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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국가(國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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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올림픽 출전 선수들에게 "경기장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고 딴 짓을 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며 경고했다고 한다. 과연 푸틴답다. 발단은 지난 6월의 유로축구선수권대회였다. 스페인전을 지켜보던 그는 식전 행사로 러시아 국가가 울리는데도 일부 선수가 껌을 씹는 것을 보고 격노했다. 결국 불똥이 올림픽선수단에까지 튀어 '국가 부르기' 교육을 시킬 지경이 된 것이다. 국가안보회의(KGB) 요원이었던 푸틴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러시아 경제를 살렸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KGB 출신들로 친정체제를 구축해 정적을 제거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등 독재자의 행태도 보이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던 1970년대에 국기 하강식이란 게 있었다. 오후 6시가 되면 누구나 하던 일, 가던 길을 멈추고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를 취해야 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는 '국기에 대한 맹세'도 따라나왔다. 극장에서도 영화 시작 직전 애국가가 나오면 입에 물었던 오징어를 마저 씹지 못한 채 일어서야 했다. 수천만명의 개인을 그처럼 길들이려고 얼마나 강력한 철권(鐵拳)을 휘둘렀겠는가. 그리고 그 뒤에는 항상 '국가 앞에 개인은 없다'는 국가지상주의가 변명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국기와 국가(國歌)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건 국가주의를 내면화하는 일상의 의식(儀式)이었다.

푸틴처럼, 어쩌면 박정희식 국가주의 덕에 오늘 선진국 대열의 말석이나마 차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폭압 정치 아래서 개성과 사상.양심의 자유, 다원성 같은 소중한 가치들이 훼손되고 그 후유증이 오래 갔다.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리바이어던'에는 자유의 여신상을 부수는 인물이 나온다. 국가라는 '거대한 괴물'(리바이어던)이 개인을 포박하는, 위선적인 미국의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항이었다. 각박한 세계 정치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소간의 국가주의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국가주의의 망령에 홀리지 않도록 눈을 부릅떠야 한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많은 한국 선수가 시상대에 오를 것이다. 태극기와 애국가 앞에서 너무 경직되지 않는, 그렇다고 경망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자세를 보고 싶다.

이영기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