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에릭 로샹 감독 '동정없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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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프랑스 에릭 로샹 감독의 '동정없는 세상' 은 9년전에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그 시간차를 극복할 만한 감각을 갖고 있다.

배우들의 의상이 조금 묵은 감이 있으나 스크린에 비치는 젊은이들의 흔들리는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다.

암울한 가운데에서도 톡톡 튀는 발랄함, 연신 쏟아지는 수다에 담긴 재치와 낭만은 프랑스 영화다운 감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동생에게 빌붙어 살며 포커게임으로 소일하는 대학중퇴생 이포와 마약장사에 열올리는 재수생 동생 자비에에겐 거대한 정치적 명제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다.

볼품없고 궁색한 이들의 방에 카메라의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영화는 매우 암울한 풍경화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수' 이포와 사랑에 빠진 지적이고 야심찬 동시통역사 나탈리를 통해 성공을 꿈꾸는 엘리트들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감독은 젊음의 또다른 모습을 그린다.

교감하기 어려울 만큼 서로 다른 세계의 두 남녀가 맺는 돌발적 사랑은 에펠탑의 빛나는 실루엣, 푸른 안개가 감도는 도시풍경과 어울려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의 불안과 삐걱거림을 동반한다.

영화는 에펠탑의 조명이 꺼질 때 손가락을 튕기는 이 연인들의 장난을 보여주는 발랄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꿈도 없이 살아가는 기계' 라는 주인공의 냉소적인 발언만큼이나 절망적인 결론을 맺고 만다.

감독이 그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는 배우 이폴리트 지라르도가 자신의 애칭을 딴 주인공 이포 역을, '소년, 소녀를 만나다' '토토의 천국' 의 미레이유 페리에가 나탈리 역을 맡았다.

프랑스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한 에릭 로샹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4일 개봉.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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