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국과수의 아리송한 감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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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판문점 총격요청 의혹사건' 관련 피의자 2명의 고문 여부를 가리기 위해 실시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국과수.國科搜) 의 신체감정 결과가 오히려 고문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법원에 제출된 신체감정서 내용이 지나치게 모호하게 표현돼 있어 검찰이나 변호인, 안기부가 각각 아전인수격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을 정도니 누구 말이 옳은지 국민들은 점점 어리둥절할 뿐이다.

국과수가 우리나라 최고 권위의 감정기관인데다 전문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감정결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러나 이번에 법원에 제출된 감정서는 누가 보더라도 국과수가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가장 핵심부분에 대해 "신체에 외력 (外力) 이 작용했는지를 논할 수 없다" 면서도 "몸에 상처 흔적이 일부 남아 있으나 어떤 원인에 의해 생긴 것인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상처 흔적으로 볼 때 외력이 가해진 적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고 밝힌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도대체 외력이 가해졌다는 뜻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린다.

또 "사진은 합성.변조 등의 가능성이 있음을 참고해야 한다" 고 단서를 붙인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만일 합성이나 변조 의심이 간다면 그것조차도 결국 국과수가 밝힐 일이 아닌가.

문서감정 분야와 협력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혹을 해소하겠다는 자세가 아쉽다는 것이다.

국과수의 권위와 신뢰는 정확하고 명쾌한 감정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과거에는 시국.공안사건의 경우 권력에 의해 감정내용이 왜곡된 경우도 적지 않아 국과수의 공신력이 사회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서 경찰 간부의 압력을 받아 심장쇼크사라고 했던 사인 (死因) 이 두차례 수정 끝에 경부압박 질식사로 바뀐 것이 좋은 예다.

물론 시기가 지난 가혹행위 여부를 정확히 가려내는 데는 과학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또 고문 여부 결정이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판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 정도의 감정도 그들로서는 최선의 노력을 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국과수가 행정자치부 소속으로 있는 한 국민들이 바라는 정확하고 명쾌한 감정이나 공신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11명의 직원이 연간 2천7백여명을 부검해야 하는 업무과다나 처우와 시설 장비.근무여건 등이 열악하다는 문제는 그 다음 차원이다.

소신있게 일할 수 있도록 독립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준 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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