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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눌린 여름밤...퓨젤리, 괴물의 원형을 그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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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호 08면

1 악몽(인큐버스·1790~91), 헨리 퓨젤리 작, 캔버스에 유채, 76.5x63.5㎝, 괴테 박물관, 프랑크푸르트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섬뜩한 그림 중 하나가 헨리 퓨젤리(1741~1825)가 그린 ‘침묵’(사진2)이다. TV에서 기어 나오는 사다코의 200년 전 조상쯤 될 것 같은 그림인데, 한밤중에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 속 인물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머리카락 사이 핏발 선 눈으로 마주 쳐다볼지도 모를 일이다!

문소영 기자의 대중문화 속 명화 코드 : 인큐버스에서 프랑켄슈타인까지

하지만 이 그림을 좀 더 보고 있으면 그림 속 인물이 고개를 획 들까봐 무서운 것보다, 고개를 점점 더 숙일까봐 무서워진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침묵’과 암흑 속으로 더욱 침잠하면서, 보는 사람까지 그 무기력의 심연과 절망의 나락으로 빨아들일까봐 말이다.

2 침묵(1799~1801), 헨리 퓨젤리 작, 캔버스에 유채, 63.5x51.5㎝, 쿤스트하우스, 취리히

스위스 출신의 영국 낭만주의 화가 퓨젤리는 이렇게 중세 회화의 해골이나 바로크 회화의 피가 낭자한 장면을 쓰지 않고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공포를 이끌어내는 그림을 그려내는 데 탁월했다. 그런 그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바로 ‘악몽’(사진1)이다.

이 그림 속 여인은 지금 가위에 눌리고 있다. 이 가위 눌림은 박쥐 비슷한 음침한 존재가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타고 누르는 것으로 형상화돼 있다. 이 존재의 이름은 그림의 부제이기도 한 ‘인큐버스(Incubus)’다. 우리말의 가위가 본래 잠든 사람을 누르는 귀신을 뜻했던 것처럼, 옛 유럽인들 또한 가위 눌림이 인큐버스라는 악마의 짓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3 퓨젤리의 ‘악몽’ 최초작(1781)이 표지로 쓰인 소설 39프랑켄슈타인(1818)39 2006년 롱맨 출판사판4 영화 ‘고딕(1986)’ 포스터

퓨젤리의 ‘악몽’은 처음 보는 순간 오싹할 뿐만 아니라 묘하게 불쾌한 뒷맛이 오래 남는데, 그것은 이 그림의 강한 성적인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상체를 활처럼 뒤로 젖힌 채 침대에 걸쳐져 있는 여인이나, 눈에 이상한 빛을 내며 머리를 커튼 안으로 들이밀고 있는 말이나, 상당히 에로틱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말은 악몽을 뜻하는 영어인 nightmare의 어원과 관련 있을 뿐만 아니라(mare는 암말을 뜻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제되지 않는 정욕의 상징으로 쓰이곤 한다. 그리고 유럽 전설에서 인큐버스는 잠자는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 음란한 악마라고 한다.

퓨젤리는 이 주제를 여러 버전으로 그렸고 최초 버전은 1781년 발표했다(사진3). 미술사가들은 퓨젤리가 그 그림을 그리기 1년여 전에 어떤 여인에게 청혼했다가 그녀의 부모에 의해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 그림은 그녀에 대한 퓨젤리의 억눌린 욕망과 복수심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그녀를 압박하는 인큐버스는 바로 퓨젤리 자신일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르게, 그림 속 여인은 자기 자신의 욕망과 그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관능적인 욕망을 죄악시하는 사회에서 평소에 철저히 억눌렸던 욕망이, 사람들이 비몽사몽의 상태에 있을 때, 즉 이성이 느슨해진 틈에, 뒤틀린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 사람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 보든지, 이 그림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억눌린 무의식과 리비도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훨씬 이전에 그것들을 절묘하게 도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은근히 도발적인 그림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보수적인 영국 사회의 반응은 과연 어땠을까? 뜻밖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마침 이 시기는 고딕 소설(Gothic Novel)이라고 해서 중세의 고성을 배경으로 유령, 흡혈귀, 악마가 출몰하고 마법과 음모가 펼쳐지는 섬뜩하고도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유행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이런 유행은 일종의 반동이었다.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 사상과 과학의 발달로 신만의 영역과 신비가 사라지는 것에 반발하는 것이었다.

이런 문화적 분위기에서 탄생한 퓨젤리의 ‘악몽’은 다시 당대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렇게 영향을 받은 작품 중에는 고딕 소설의 창조적인 변형이자 근대 SF의 선구적 소설이 된 ‘프랑켄슈타인’이 있었다.

어렸을 때 이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두 가지는 프랑켄슈타인이 그 이마 넓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그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 이름이라는 것과 이 SF의 작가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걸친 19세기 여인 메리 셸리였다는 것이다! 메리 셸리는 그녀의 남편이며 대표적인 영국 낭만파 시인인 퍼시 셸리와 함께 역시 낭만주의 문학의 거성인 바이런의 별장에 머물면서 무서운 이야기 짓기 게임을 하다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소설 서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악몽을 꾸면서 결정적인 영감을 받았는데, 그 꿈은 한 기술자가 시체를 조합해 만든 인조인간에 전기를 흘려 넣자 그 인간이 ‘생명의 조짐을 보이며 반쯤 굳은 불편한 몸짓으로 움직였고’ 그 기술자는 스스로의 성공에 겁을 집어먹는 장면이었다. 그녀는 그다음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기술자)는 잠이 든다; 하지만 깨어난다; 눈을 뜬다; 보라, 그 무시무시한 것이 그의 침대 곁에 서서 침대 커튼을 열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 노랗고 흐릿하지만 생각이 있는 눈으로.”

이 구절은 퓨젤리의 ‘악몽’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고 또 소설 중간에서 인조인간에게 살해된 프랑켄슈타인의 약혼녀 모습이 ‘악몽’ 속 여인과 흡사하기 때문에, 많은 문학비평가들이 이 그림과 소설의 연관성을 언급하곤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의 표지 그림으로 ‘악몽’이 곧잘 쓰이고 (사진3) 최초의 프랑켄슈타인 영화(1931)에서 살해된 약혼녀도 ‘악몽’ 속 여인처럼 팔을 뒤로 늘어뜨리고 침대에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영국 감독 켄 러셀이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된 과정을 픽션으로 그린 1986년 영화 ‘고딕’의 포스터(사진4)도 퓨젤리의 ‘악몽’을 실사로 재현하고 있다.퓨젤리는 이성으로도 완전히 죽일 수 없는, 이성이 잠들 때마다 호시탐탐 깨어나는 괴물인 욕망을 그림으로 그렸고 셸리는 이성의 과신이 만들어낸 괴물을 소설로 그려냈다. 이것이 ‘이성의 시대’ 속에서 그 한계를 본 예술가들의 시선이었다.


중앙데일리 경제산업팀 기자. 일상 속에서 명화 이야기를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며, 관련 저술과 강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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