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더 법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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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호 33면

뒤로 자빠져도 코를 깬다고 했나.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자꾸 안 되는 쪽으로 흐르는 걸 ‘머피의 법칙’이라 한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공산이 의외로 크다는 경험칙에서 나온 말이다. 운이 없을 땐 ‘왜 나만 이렇나’ 하며 따져봤자 소용이 없다. ‘그래, 머피의 법칙이지 뭐’ 하며 넘어가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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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경제정책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앨런 블라인더 프린스턴대 교수의 주장이다. 앨런 그린스펀 밑에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부의장을 지낸 그는 1987년 한 논문에서 자신의 ‘발견’을 이렇게 소개했다.

“경제학자들은 스스로 의견일치를 본 정책에 대해선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가 작다. 반대로 의견이 중구난방으로 엇갈리거나 자신도 잘 모르는 정책에 대해선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대단한 법칙이라기보다 경제학자와 정책 결정권자 모두를 슬쩍 비튼 말로 들린다. 하지만 폴 크루그먼 교수도 이를 인용하는 걸 보면, 학계에선 제법 통하는 말인 듯하다.

사실 경제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정책은 정치인이나 공무원에겐 그러려니 해 보여 별 관심을 끌지 못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경제학자들은 전통적으로 관세나 수출입 쿼터 제도에 반대해 왔지만 씨가 먹히지 않았다. 또 환경보호를 위해 배출 규제를 도입하자는 경제학자들의 오랜 주장도 내내 방치됐다가 요즘에야 입법화되기 시작했다.

반대로 저명한 학자들 사이에 서로 엇갈리는 주장이 나올 경우엔 상황이 달라진다. 뭐가 옳고 그른지 잘 모르는 정책 담당자로선 어느 하나 허투루 대할 수 없다. 학자들의 말발은 역설적으로 더 세진다. 옳고 그름에 관계 없이 여러 편으로 나뉜 채. 경제학자, 참 좋은 직업이다. 블라인더 스스로 경제학자이면서 동업자들을 상당히 냉소적으로 본 셈이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했나. 전문가들 사이에 복수의 상충되는 정책 제안이 나올 경우 정부는 하필이면 최악을 고른다는 것이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외교도 마찬가지라 한다. ‘머피의 법칙’이 정책 결정 전반에 작용한다고 봤으니, 그 외연이 너무 넓어졌다. 그래서 이를 ‘블라인더의 법칙’이라 부르기도 한다.

결과론적으로만 본다면 실패한 정책 중에는 집행 과정이 아니라 결정 자체가 잘못된 ‘최악의 선택’이 부지기수다. 2001~2004년 FRB의 저금리 정책,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전쟁 등이 그런 사례 아닌가 싶다. 상반된 주장이 교차하는 가운데 결정권자가 취한 대안은 결국 실패로 평가받고 있지 않나.

이거 남의 얘기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경기 흐름이 미묘한 시점에 이르면, 전문가들의 입에선 서로 다른 말이 나오곤 한다. 제안도 엇갈린다. 누가 맞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 비슷하게 주목을 받는다. 요즘이 딱 그렇다. 출구전략을 준비해야 한다느니, 거론하는 것 자체가 시기상조라니 하면서 엇갈린다. 정부는 일단 후자를 택했는데, ‘블라인더의 법칙’이 이번만큼은 눈 감고 지나가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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