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은행장 가둔 금융노사 충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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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 경제의 구조개혁 작업의 핵심은 은행의 개혁에 있다.

이 점은 지난 14일 열린 아시아 언론인 포럼에서 휴버트 나이스 국제통화기금 (IMF) 아태담당국장도 기조연설을 통해 강조했다.

그런데 같은 날 열린 은행 노사교섭에서 노조 간부들이 교섭상대인 은행장들을 이튿날 오전까지 사실상 감금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찰이 노조간부들을 연행하면서 은행장들은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은 농성투쟁을 선포했다.

이것은 은행 개혁작업 속에 들어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인원감축이 이를 둘러싼 노사충돌 때문에 이미 본격적인 난관에 들어갔음을 뜻한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조건부 승인' 9개 은행에 대해 지난해 말에 비해 40%의 인원을 연내에 감축할 것을 생존을 위한 이행조건의 하나로 내걸었다.

이 수치는 너무 크거나 조잡한 근사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인원을 줄이지 않고서는 이들 은행이 회생할 수 없다는 것은 대체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사실상 이 9개 은행은 현재의 부실을 가까스로 받쳐주고 있는 손을 치우면 당장 쓰러지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다.

예컨대 지금이라도 정부가 예금자보호 선언을 철회하기만 해도 이들 은행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이 사실에 비춰보면 이 수치에 관련된 시비는 입지 (立地) 를 잃어 버린다.

은행경영의 부실이 근로자가 책임질 일이 아님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처한 난국은 이런 것을 따지는 일이 아무 소용 없게 할 정도로 심각하다.

며칠전 은행의 대주주 한 사람은 은행 감자 (減資) 의 부당함을 신문에 광고로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은행주주가 언제 주주총회에서 경영자를 선임하거나 경영을 감사할 수 있었던 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리도 자본금을 다 까먹은 회사는 그것이 누구의 책임이든간에 회생하려면 감자할 수밖에 없다는 훨씬 더 큰 진실 속으로 함몰될 수밖에 없다.

지금 은행은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만이 남았다.

은행을 살리기 위해 국민이 세금을 내거나 인플레이션을 견뎌야 하는 부담은 엄청나게 크다.

노동조합은 이 점을 직시해야 한다.

보수를 받은 일도 없고 배당기회도 없었던 일반 납세자가 져야 하는 이 부담 앞에서,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은행은 살려야 한다는 절대적 명제 앞에서 과거의 책임소재 규명 같은 것은 그 절실성을 모두 잃고 만다.

은행의 인원감축은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다.

이 조건을 정부가 붙인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다.

생존을 위한 객관적 조건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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