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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잘 터지게, 2000년대엔 더 똑똑하게 경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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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호 22면

관련 기술이 전무한 상태에서 연구진은 일본 도쿄 지점을 통해 카폰 10대를 들여왔다. 당시 카폰 한 대 값은 200만~300만원으로 서울 변두리 지역 전셋값과 맞먹었다. 연구원들은 카폰을 수도 없이 뜯었다 붙였다 하면서 기본 구조부터 익혀 나갔다. ‘역엔지니어링’이라고 부르는 기술 모방으로 후발 주자가 선진 기술을 익히기 위해 흔히 쓰던 방법이었다.

휴대전화 개발사 단말기 시장의 두 거인, 삼성전자·LG전자

삼성은 3년에 걸친 연구 결과 ‘SC-100’이란 국산 카폰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외국 제품과는 품질에서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조악했다. 참담한 실패였다. 사업을 총괄했던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당시 상무)은 오랜 고민 끝에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다시 한번 해 볼 테니 이번엔 모토로라의 제품을 사 주십시오.” 고심하던 사장(당시)도 ‘휴대전화는 언젠가 될 사업’이란 믿음으로 계속 지원을 결정했다.

이렇게 쌓은 기술을 바탕으로 삼성은 88년 서울올림픽 때 최초의 국산 휴대전화를 선보일 수 있었다. ‘SH-100’ 모델로 올림픽에 참석한 세계 VIP들에게 나눠 줬다. SH-100의 무게는 700g으로 당시 모토로라의 주력 제품 ‘다이나택 8000’(771g)보다 가벼웠다. 모토로라가 83년 세계 최초로 내놓은 휴대전화 다이나택(1.3㎏)에 비하면 무게가 절반 수준밖에 안 됐다.

다이나택은 가로 228㎜, 세로 127㎜ 크기로 벽돌(190㎜×90㎜)보다 커 ‘망치폰’ 또는 ‘벽돌폰’으로 불렸다. 삼성의 첫 모델은 무게와 크기에선 경쟁력을 갖췄지만 통화 품질이 좋지 않다는 원성을 적지 않게 들어야 했다.

사업 초기 실패와 시행착오는 훗날의 성공을 위한 귀중한 밑거름이 됐다. 93년 6월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주재한 신경영 회의에서 삼성은 당시 부동의 1위였던 모토로라를 이기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각오 아래 같은 해 11월 ‘SH-700’이란 제품을 출시하며 국내 시장 점유율을 단숨에 15%까지 끌어올렸다.

94년에는 신제품 ‘SH-770’에 처음으로 ‘애니콜’ 브랜드를 선보이며 “한국 지형에 강하다”는 점을 내세워 대대적 마케팅을 펼쳤다. “미국 시장을 위주로 개발된 모토로라 제품은 인구밀도가 높고 구릉과 산이 많은 한국 여건에선 적합하지 않다”며 역공에 나선 것이다. 87년 미국 업체와 기술 제휴로 카폰 개발에 나선 LG정보통신(이후 LG전자에 합병)도 90년대 초반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CDMA 상용화가 분수령
96년 1월 정부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디지털 휴대전화 서비스를 도입함으로써 국내 휴대전화 업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디지털 제품 개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LG는 그해 2월 국내 첫 CDMA 휴대전화(LDP-200)를 선보였다. 통화 중 녹음기능과 착신 램프 기능을 갖춘 이 제품의 무게는 230g이었다. 삼성도 뒤질세라 4월 CDMA 휴대전화 ‘SCH-100’(175g)을 내놨다. 국내 업체들이 발 빠르게 디지털 제품을 공급하는 동안 모토로라는 기존 아날로그 제품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삼성은 모토로라를 이기는 데 성공한다. 96년 국내 시장의 절반가량을 삼성이 차지한 반면 모토로라의 점유율은 10% 수준으로 급감했다.

90년대 중반에서 2000년 이전까지 경쟁은 주로 ‘통화 품질’이었다. 단말기 업체들은 전파 수신율을 높이는 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잘 터진다” “걸면 걸리니까 걸리버지예” “작은 소리에 강하다” 등 휴대전화 업체의 광고 카피가 당시 상황을 말해 준다.

다이어트 경쟁도 치열했다. ‘1g의 전쟁’으로 불리던 휴대전화의 소형화ㆍ경량화 붐이었다. 98년 들어선 단말기 무게가 100g 밑으로 떨어졌다. 어필텔레콤이 같은 해 5월 79g짜리 단말기(APC-1000)로 놀라움을 안겨준 것도 잠시였다. 삼성이 질세라 77g짜리(SPH-6310)를 출시했고, 심지어 62g짜리 초경량 단말기(LG의 LGP-6400F)도 나왔다.
막대(bar) 형으로 단조롭던 단말기의 외형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버튼부에 덮개가 있는 플립(flip)형이나 뚜껑을 열고 닫는 폴더(folder)형이 등장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디자인은 여전히 투박했고 색상도 검은색이나 흰색·은색이 대세를 이뤘다.

3세대폰, 다기능 경쟁 불붙여
2000년대에 들어서자 휴대전화가 정보ㆍ엔터테인먼트의 도구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무선 인터넷으로 게임ㆍ음악ㆍ동영상 등을 즐기는 ‘멀티미디어폰’이 등장한 것이다.
초반에는 기존 폴더형의 단점을 보완한 ‘듀얼폴더’(삼성 SCH-A2000)가 인기를 끌었다. 폴더의 바깥쪽에도 액정 화면을 설치, 폴더를 열지 않고 현재 시간이나 배터리의 잔량을 알려주는 것이 특징이었다. 삼성의 ‘SGH-T100(일명 ‘이건희폰’)’은 컬러폰 시대를 열었다. 국내 제품으로는 최초로 세계 시장에서 1000만 대 넘게 팔리는 기록도 세웠다.

3세대 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되자 단말기도 ‘다기능 구현’에 초점이 맞춰졌다. 휴대전화에 MP3나 카메라 기능이 첨가됐다. 팬택계열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33만 화소의 카메라폰(PD-6000)을 선보여 카메라폰 대중화의 초석을 놓았다. 이후 삼성의 SCH-B600(2006년)은 1000만 화소 카메라폰 시대를 열기도 했다. 2004년 위성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이 도입되자 LG의 ‘SB100’ 등 DMB폰이 잇따라 나왔다. 이 밖에 깨끗한 음질을 위한 ‘64화음폰’, 동영상이나 사진을 편하게 보기 위해 액정화면이 90도 회전하는 제품 등도 개발됐다.

2005년을 전후로는 세련된 디자인과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중요하게 부각됐다. LG의 초콜릿폰(SV590)은 젊은 세대의 감성을 효과적으로 파고들면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입증한 제품으로 평가할 만하다. 삼성의 ‘SGH-E250’은 슬림 슬라이드 디자인과 캠코더ㆍ블루투스 등 첨단 기능으로 4000만 대 넘게 판매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팬택의 ‘돌핀폰(IM-U220)’ ‘러브캔버스폰(IM-R300)’ 등은 신세대 취향의 독특한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았다.

2007년에는 터치 스크린 방식의 ‘터치폰’ 시대가 열렸다. LG는 명품 브랜드를 활용한 ‘프라다폰(KE850)’을 세계 최초의 터치폰으로 개발했다. 숫자와 메뉴 버튼을 포함한 키패드를 완전히 없앤 당시로선 획기적인 디자인이었다. 이후 터치폰의 열풍은 삼성의 ‘터치위즈(F480)’와 ‘햅틱 아몰레드’, LG의 ‘아레나폰’ 등으로 이어지며 최근 휴대전화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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