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비리·사정 수사하고 재판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정치권에서 수사도 하고 재판도 하나 - . 최근 정치권에서 정치인 사정 (司正) 이나 특정인사 보석.재판 진행계획 등을 거론하는 사례가 잦아 검찰과 법원 관계자들이 '고유권한을 침해하는 행위' 라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검찰에선 이 같은 사례가 빈발함에 따라 소장검사들을 중심으로 "검찰이 정치권에 지나치게 예속되는 증거가 아니냐" 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급기야 최근엔 김태정 (金泰政) 검찰총장이 직접 청와대 관계자에게 항의전화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박지원 (朴智元)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주 "검찰이 다음주부터 정치인을 소환조사한 뒤 사법처리할 것" 이라며 "수사결과 상당한 증거를 포착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고 말했다.

이어 김중권 (金重權) 비서실장도 "검찰 내부에 범죄구성요건이 되지 않는 자금의 흐름과 관련 있는 정치인도 공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며 검찰 수사내용에 관한 발언을 했다.

이에 앞서 국민회의 김영환 (金榮煥) 정세분석실장은 국회 대정부 질문을 통해 "청구그룹이 2백억원, 기아그룹이 9백억원을 옛 여권에 제공했다는 의혹이 있는데 사실이냐" 고 추궁했다.

이처럼 정치권이 사정관련 발언을 계속하자 검찰 수뇌부는 28일 기자간담회를 자청, 이들의 발언내용을 대부분 부인했다.

대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치권에 건네졌을 가능성이 있는 기아 비자금은 43억원 뿐인데 무슨 9백억원이냐. 그런 주장을 하려면 증거를 제시해야지" 라고 반박했다.

또 다른 고위 관계자도 "현재 청구.기아.경성사건과 관련 일부 정치인들의 비리 의혹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구체적 비리혐의가 포착되지 않은 상태" 라며 정치인 무더기 소환임박설을 부인했다.

또 지난 27일 한 여권 관계자는 "편파수사 시비를 없애기 위해 가급적 불구속 수사 한 뒤 2~3일 간격으로 집중심리를 해 재판을 빨리 끝내고 죄질이 나쁘면 법정구속을 활용하면 된다" 고 말했다.

이에 앞서 여야 3당 정책위의장도 24일 외환위기 사건으로 구속 중인 강경식 (姜慶植) 전 부총리와 김인호 (金仁浩) 전 경제수석을 경제청문회에 출석시키기 위해 보석 출감을 추진키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법원 관계자는 "판사의 고유권한인 보석에 대해 정치권이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고 반발했다.

이밖에 최근 한 여권 인사가 수배 중인 한총련 학생 56명이 준법서약서를 쓸 경우 기소유예해주기로 방침을 마련했다고 발표하자 검찰이 보도자료를 통해 이를 부인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이 같은 사태가 계속되자 사정활동을 총괄하는 대검 중수부 실무진은 "정치권의 발언은 현재 수사상황과는 동떨어진 부분이 많아 수사팀의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다" 며 "특히 정치권이 수사상황보다 앞선 내용을 발표할 경우 국민의 눈에는 검찰의 사정활동을 정치권이 지휘하거나 악용한다는 인상만 심어줄 것" 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정철근.예영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