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모스크바 표정]상인들 가게 닫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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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8일 오전 9시 모스크바 트베리스카야 울리차에 위치한 SBS - 아그로방크 앞. 은행 문을 열려면 한 시간이나 남아 있는데도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은행이 곧 국유화되고 인출이 동결될 것이란 소문이 나자 돈을 빼내기 위해 달려온 예금주들이다.

3시간째 줄을 서 있다는 아나톨리 (64) 는 "달러도 아니고 루블화를 인출하기가 어려워진 것은 평생 처음" 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경제위기가 정치위기로 비화되면서 그동안 비교적 흔들림이 없었던 시민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

같은 시간 푸슈킨 광장 건너편. 이즈베스티야 신문사 앞 조그마한 햄버거 가게와 상점을 운영하는 안드레이 (33)가 부인과 함께 가격표를 열심히 바꿔 달고 있다. 수시로 오르는 환율에 맞춰 물건 값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사임설에 대해 물어봤다. "사임은 관심도 없어요. 내 돈만 뺏기지 않으면 되는 거요. 어느 놈이 들어와도 똑같은 것 아닙니까. " 정치인을 반지트 (도둑) 라고 욕을 한바탕 하던 그는 "국민을 위한 정권이 러시아에 언제 있었느냐" 고 흥분했다.

정치에 관심 쓸 겨를도 없이 살아가는데 하루가 바쁘다. 상인들은 '팔수록 손해' 라며 속속 문을 닫고 있다.

'레몬트 (수리 중)' '기술적 이유로 휴업' 등의 안내문이 나붙은 상점들 때문에 시내 중심가 분위기마저 썰렁하다.

또 2주 연속 식료품 해외구입 주문이 없다는 소문이 돌면서 외국 수입품에 50% 가까이 의지하고 있는 모스크바에선 조만간 생필품 마저 구입하기 어려울 것이란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오전 10시. 모스크바 옥차브리스카야 지하철역 앞에서 담배를 박스째로 자동차에 싣고 있던 대학생 파벨은 "있는 루블을 다 끌어 모아 담배를 샀다. 갖고 있어 봐야 손해니 물건을 사두는 게 낫다" 고 말했다.

버터. 설탕 등 식품 사재기는 일반적 현상. 달러공급이 안되자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암달러상들도 나타나고 달러위조범도 출현해 서민들을 울리고 있다.

아직 공황적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모스크바시 경찰국이나 내무부 당국자들은 "지하철역 등에 경비와 순찰을 강화하고 있지만 누군가 돌발적 상황을 일으키면 폭탄의 뇌관을 건드린 것처럼 사회적 긴장이 폭발할까 걱정" 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모스크바 = 김석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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