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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19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승희의 목수건이 다시 한번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사이 벌써 낯익은 고가도로가 차창 위로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삼척에서 출발하면 반드시 이 육교 아래를 지나쳐야만 장터로 진입할 수 있었다.

시각은 아직 여덟시를 넘지 않고 있었다. 이면도로 연석선에 붙여 용달트럭을 정차시킨 그 순간부터 세 사람은 벌써 운전석 안에서 있었던 울쩍한 대화들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들은 가파른 눈길로 북쪽의 공한지로 시선을 돌렸다. 단골로 좌판을 폈던 공터는 물론 이른 아침이었으므로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었다.

세 사람의 동작은 어느새 다람쥐처럼 재빨라졌다.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좌판 정리와 차일까지 치고 화덕에 불까지 피울 수 있었다.

결국 아침밥은 좌판으로 배달시킨 찌개로 때우기로 하였다.

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어물상자를 뒤집고 그 위에다 음식 접시들을 올려놓는 일은 승희 차지였다.

작고 조촐한 행복이 때묻은 반접시마다 가득가득 고였다고 승희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맞은 편 노점상에서 치고 있는 차일막 때문에 먼지가 뽀얗게 날아들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장바닥이란 북새통이 드셀수록 신바람이 나고 그 신바람으로 초인사를 건넬 사이도 없이 너나들이로 친숙해지기 때문이었다.

두세 살 차이쯤은 필경 너나들이로 상종하였고, 사오년 손위로 보이면 첫마디부터 형님이었기 때문에 본데없는 위인이 있을 수 없었고, 버르장머리 없는 위인은 살아 남을 수 없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11시를 넘기고부터였다. 아침 안개까지 끼었던 하늘에서 가을걷이 무렵 때처럼 세차지도 않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노점상의 얼굴에도 실망의 빛을 읽을 수는 없었다.

비가 내리면 필경 갤 때가 있을 것이고, 갠 날이 계속되면 반드시 비가 내렸기 때문이었다.

북평장에서 비를 흠뻑 맞으면, 강릉장의 흐린 날씨에 옷깃이 말랐고 영월 덕포장의 따가운 햇살에 다림질이 되곤 하였다.

하늘이 저지르는 일을 그때마다 경망스럽게 원망하고 투정하다 보면, 머리만 세고 주름살만 깊어간다는 것을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외장꾼으로 발천하여 이 장터 저 장터를 속절없이 뒹굴며 살다 보면, 언젠가는 그래서 득도한 일흔살 농사꾼처럼 오장육부가 저절로 느긋해지고 아랫배가 나오게 된다.

차일막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기 시작하면서 승희는 개의치 않고 반건조 오징어를 굽기 시작했다.

공짜로 준다는 광고가 핸드마이크에서 퍼져나가면서 근처에 있던 상인들부터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속임수는 아니었기 때문애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소문은 삽시간에 북평장터로 퍼져 나갔다.

한씨네 좌판이 있는 차일막 아래로는 이십여개를 헤아리는 우산들이 늘어서 있었다. 거개가 구매력이 없는 조무래기들이거나 여중생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공짜손님이 한바탕 북새통을 피우고 지나간 뒤, 겨냥했던 대로 오징어는 팔리기 시작했다. 반건조 오징어를 몇 축씩 사가는 장꾼들이 많았다.

각박한 세상일수록 오히려 넉넉한 인심이 신선해 보이고 야박한 사람들 틈 속에서 피어나는 인정은 더욱 두드러지게 빛나는 법이다. 이에는 이고 눈에는 눈이 아니다. 그것은 우선 즐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즐거운 표정의 사람 앞에는 언제나 즐거운 사람이 나타나고, 속임수를 가진 사람 앞에는 언제나 허위의 그림자만 나타난다.

비밀을 가진 사람 앞에는 백주대로에서도 반드시 의심의 자락이 덮이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자에게 진정한 불행은 비켜간다.

승희는 비로소 삼척장에서부터 공짜로 돌린 오징어의 비밀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발 없는 소문이 천리를 간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상술이었지만 경박하지 않았고, 조마조마했던 가슴이 가라앉은 뒤의 평온은 더욱 뿌듯하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래서 하잘것없는 노점상들에게도 자부심이란 것이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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