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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차르 흉내내려던 고종, 국민국가 수립 여망 저버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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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한 세기 전 시대적 과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1897년 10월부터 1910년 8월까지 약 13년간 존속한 대한제국 시기는 국민국가 수립을 꿈꿀 수 있던 마지막 기회였다. 특히 민권을 외치던 독립협회(1896~98)가 해산된 뒤 이 과제를 두 어깨에 짊어진 이는 고종이었다. 그의 지도력에 대한 당대의 세평은 호평과 악평이 대척점을 이룬다. 대한제국 이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896년 10월에 나온 ‘코리언 레퍼지터리’는 “폐하는 많은 시간을 공무수행에 쏟으며, 정부의 모든 부서들을 감독·감찰하면서 아주 부지런하게 일한다. 폐하는 진보적이다. 서양인들, 제도들과 관습들에 적대적이지 않다. 그는 교육적인 일에 아주 관심이 많으며 최근 수년간 물질적인 진보들이 이루어졌다”고 해 그의 지도력과 ‘진보적’ 정치성향을 호평했다.

그해 6월 20일자 ‘독립신문’의 논설도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애국애민하시는 성의가 열성조에 제일이시고 나라가 독립이 되어 남의 제왕과 동등이 되려는 것은 곧 폐하의 직위만 높이시려는 것이 아니시라. 폐하의 직위를 높이셔야 신민들이 높아지는 것을 생각하심이라”고 해 호감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들어서고 입헌군주제를 세우려 했던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자 고종에 대한 반감은 높아만 갔다. 의회 설립을 주도했던 윤치호는 1898년 11월 5일자 일기에 ‘독립협회 해산과 헌의(獻議)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파면시킨 칙령’을 발포한 고종에 대한 실망감을 강하게 표출했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어떠한 거짓말을 잘하는 배신적 겁쟁이라도 이 대한의 황제보다 더 비열한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는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할 무렵 1905년 6월 20일자 일기에 1896년부터 1904년 사이에 한국을 지배한 위정자 모두, 즉 고종과 그 추종세력들을 “우리 역사상 최악의 반역자”로 심판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할 위기에서 제정 러시아에 기대어 등장한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 1899년 8월 17일 공포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에 따르면 황제는 육해군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관리임명권, 조약체결권, 사신임면권 등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차르 복장을 입은 고종(사진 왼쪽, 옆은 순종)의 모습이 웅변하듯, 그때 고종은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따라 배우려 했던 인권의 시대 근대를 역행한 전제군주였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