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6월 20일자 ‘독립신문’의 논설도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애국애민하시는 성의가 열성조에 제일이시고 나라가 독립이 되어 남의 제왕과 동등이 되려는 것은 곧 폐하의 직위만 높이시려는 것이 아니시라. 폐하의 직위를 높이셔야 신민들이 높아지는 것을 생각하심이라”고 해 호감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들어서고 입헌군주제를 세우려 했던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자 고종에 대한 반감은 높아만 갔다. 의회 설립을 주도했던 윤치호는 1898년 11월 5일자 일기에 ‘독립협회 해산과 헌의(獻議) 6조에 서명한 대신들을 파면시킨 칙령’을 발포한 고종에 대한 실망감을 강하게 표출했다. “이것이 국왕이라니! 어떠한 거짓말을 잘하는 배신적 겁쟁이라도 이 대한의 황제보다 더 비열한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는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할 무렵 1905년 6월 20일자 일기에 1896년부터 1904년 사이에 한국을 지배한 위정자 모두, 즉 고종과 그 추종세력들을 “우리 역사상 최악의 반역자”로 심판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할 위기에서 제정 러시아에 기대어 등장한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 1899년 8월 17일 공포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에 따르면 황제는 육해군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관리임명권, 조약체결권, 사신임면권 등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차르 복장을 입은 고종(사진 왼쪽, 옆은 순종)의 모습이 웅변하듯, 그때 고종은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따라 배우려 했던 인권의 시대 근대를 역행한 전제군주였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