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전·현직 대통령 만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12년의 미국 제28대 대통령선거는 격렬했고 또한 흥미로웠다.

전.현직 대통령이 함께 출마해 이전투구 (泥田鬪狗) 의 공방을 벌였지만 승리의 영광은 제3의 후보인 우드로 윌슨에게 돌아갔다.

27대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은 본래 그 전임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명실상부한 '후계자' 였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피살로 그 직을 이어받아 연임했던 루스벨트는 일찍부터 태프트의 '대통령 만들기' 에 주력했고, 태프트는 그 후광으로 손쉽게 당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퇴임 당시 루스벨트의 나이는 겨우 50세였고, 대통령에 취임한 태프트는 전임자로부터의 영향력을 벗어난 '홀로서기' 의 정책을 펴나갔다.

분개한 루스벨트는 태프트의 임기가 끝날 무렵 공화당 전당대회의 후보지명에 나섰다가 실패한 뒤 진보당을 창당, 선거전에 뛰어들었으나 태프트를 낙선시키는데만 성공했을 뿐이었다.

루스벨트와 태프트의 경우는 지금까지도 전.현직 대통령간의 갈등양상을 대표하는 사례로 꼽힌다.

이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전.현직 대통령간의 불협화음은 그 뿌리가 깊다.

93년 봄 뉴욕에서는 '대통령들에 관한 대통령들의 의견 : 정상 (頂上) 비평' 이라는 제목의 흥미진진한 대통령 문서 컬렉션이 열린 적도 있다.

다른 대통령을 비판한 역대 대통령의 문서와 편지가 공개된 이 컬렉션에는 '가장 위험한 인물' '대통령직에 가장 부적합한 사람' 같은 극단적 표현들이 난무했다.

미국같은 나라에서 이 정도라면 정치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전.현직 대통령 간의 인과 (因果)가 얽힐대로 얽혀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매듭을 풀기가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누구누구는 누구를 협박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한 다음 누구누구의 정치적 생명을 끊으려 했고, 누구가 집권했을 때는 누구누구가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하지만 전.현직 대통령 간의 그같은 갈등과 불협화음은 나라의 발전과 이익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특히 현직 대통령으로선 설혹 전직 대통령이 실정 (失政) 의 주인공이라도 경험의 좋은 측면을 받아들이고 참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4명의 전직 대통령부부를 초청한 어제 저녁의 청와대 만찬은 '화해의 정치' 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