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강행군' '총진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원산 송도원을 출발해 동해안을 따라 금강산을 가는 길은 정말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였다.

쪽빛 물결의 잔잔한 바다가 해안선을 돌 때마다 마치 입체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 앞에 확 펼쳐지곤 뒤로 사라진다.

정주영 (鄭周永) 회장의 고향 통천이 지중해 연안의 어떤 미항 (美港) 보다도 아름답다는 사실을 이번 3차방북에서 처음 알았다. 통천을 지나면 고성군이다. 큰 마을이 멀리서 보인다. 저곳이 고성인가.

아파트 몸체 벽에 큰 글씨로 '강행군' 이라고 적혀 있다.

고성군을 언제부터 강행군으로 고쳤는가. 왼쪽 벽을 본다.

'총진군' 이라고 또 적혀 있다.

그때서야 강행군과 총진군은 지금 북한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슬로건임을 알게 된다. 북한은 구호.선전의 나라다.

항일유격대 시절의 구호나무 (口號木) 를 지금도 온전히 보전하듯 '조선의 심장 평양' 이라는 구호를 보면서 평양에 들어서면 눈에 띌만한 곳엔 구호 슬로건이 반드시 붙어 있다.

올해의 구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길 오른쪽의 '강행군' 과 왼쪽의 '총진군' 이다.

그 뒤를 이따금 '속도전' '자력갱생' 이 따라 붙는다.

처음 평양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우선 이 구호에 질려버린다.

당장 남으로 쳐내려간다는 뜻 아닌가.

그것도 속도까지 붙여서. 그러나 전국 어디를 다녀봐도 총진군 분위기는 볼 수 없다.

한가롭기 짝이 없는 시골의 여름 풍경이다.

이따금 폭우로 유실된 도로를 보수하는 군인들이 총진군 붉은 깃발을 걸고 비지땀을 흘리거나 김매기 일손을 돕고 있을 뿐이다.

지난해까지 '고난의 행군' 이 중요 구호였다.

고난의 행군 정신을 이어받아 식량난을 해결하고 경공업.석탄.전기사업 발전을 위해 어려운 행군을 하자는 경제개발 추진계획이 '강행군' 의 핵심 내용이다.

이를 위해선 사회주의 실천 주체인 기술자.노동자.지식인이 삼위일체돼 총진군을 해야 하며 여기에 양적 성장만이 아닌 질적 성장을 포함한 속도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총진군.강행군.속도전 모두 살벌한 군사용어지만 사실상 북한에선 경제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용어 뿐만 아니라 경제단위와 군사단위가 여러모로 중복되는 현상을 북한에선 발견할 수 있다.

구월산 험준한 고비길을 2차선 포장도로로 건설한 것도 육군 2개 연대였고 이번 여름에 다시 간 묘향산 보현사 진입로 공사도 군부대가 맡고 있었다.

검은 모루 동굴 근처에 있는 북한 최대의 상원 시멘트공장도 군부대 소속이었다.

북한은 병역 의무제가 아니다. 지원제다. 복무연한도 고정돼 있지 않다.

그런데도 1백만 이상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의 젊은이들은 어려서는 소년단, 청소년기는 청년동맹 소속이 되고 곧 이어 군인이거나 대학생이 되는 게 일반적 코스다.

생산 돌격대라는 부대가 있어 주로 건설현장의 일손을 돕는 역할로 병역을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한 군인으로 남아 있으면 의식주는 해결된다.

이렇게 볼 때 북한 사회를 구성하는 중심축은 군대다.

민간과 군인이 우리처럼 딱 구별되지 않는다.

가장 효율적인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고 각 분야의 전문기술도 지니고 있다.

북한의 군대는 우리식으로 보면 대형 건설회사도 되고 대단위 생산공장이기도 하다.

이러니 북한의 최고지도자는 기회만 있으면 군부대를 방문하고 그들과 기념사진을 찍는다.

민간과 군인을 딱부러지게 구분하는 우리식 잣대로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다.

금강산 개발계획이 남과 북의 합의에 따라 착수된다고 하자. 길도 내고 호텔도 지어야 하며 상하수도도 묻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을 누가 할 것인가.

북한에 어떤 건설회사가 있어 기술자와 인력을 동원할 것인가.

결국 이 일 또한 군인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우리 사회는 또 한번 발칵 뒤집힐 것이다.

민간 단위의 경협사업에 어째서 군인이 참여하느냐, 결국 경협은 군인을 돕는 이적행위가 아닌가 하는 여론이 들끓을 것이다.

마치 지난번 식량원조를 하면서 군량미로 둔갑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는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북을 안다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서너차례 방북으로 북을 안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북을 우리 잣대로 잴 생각만 말고 그들의 잣대로 살펴볼 여유와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의 삶 자체를 관통하는 사회문화적 틀을 알아내는 노력이 각 분야에서 이뤄져야 대화도 되고 경협도 가능한 화해의 남북시대를 열 수가 있다.

권영빈(논설위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