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젊다고 다 블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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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에 토니 블레어 같은 정치인이 등장한다면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다.

우리는 지도자 한 사람 잘못 만나면 온 나라가 휘청거릴 수 있음을 피부로 체험하고 있다.

정치가 목적 의식과 방향감각을 잃으면 더욱 절망적이다.

국회는 있으나마나한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냉소주의가 넘친다.

이런 반 (反) 정치의 계절이 '블레어 대망론' 을 낳는다.

블레어는 무엇보다 변화와 희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야망을 가진 정치인이라면 블레어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블레어 같이 되고 싶어 하는 것 또한 원칙적으로는 건강한 욕심이다.

이런 배경에서 야당 중진의원 몇 사람이 한국의 토니 블레어를 자처하고 나서 사람들을 웃기고 있다.

블레어는 아무나 되는가. 그들은 한국의 블레어인가.

아직은 아니라면 블레어가 될 싹은 보이는가. 블레어같이 이론무장이 돼 있는가. 한국의 정치풍토는 블레어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는가.

블레어를 블레어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블레어는 젊은 패기와 비전과 통찰력과 뛰어난 시대감각을 가진 정치인이다.

그는 마흔의 젊은 나이에 노동당 당수가 돼 당을 밑둥치부터 개혁했다.

'대처리즘' 의 위세에 18년 동안 깊은 패배주의에 빠져 있던 노동당은 블레어의 지도 아래 정권을 다시 잡았다.

블레어는 21세기와 새로운 천년을 시야에 붙들고 노동당이 변해야 영국이 변하고, 영국이 변해야 변화하는 바깥 세계에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유럽의 대표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노동당의 방향을 바꾸는 세 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하나는 주요 기업의 국유화와 소득 재분배를 규정한 당헌 (黨憲) 제4조를 고쳐 보수당정권의 민영화 조치들을 수용한 것이다.

또 하나는 사회복지를 축소한 대처리즘을 거의 모두 승계한 것인데 이것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개인생활을 책임진다는 노동당의 '헌법 제1조' 를 백지화하는 것이었다.

블레어는 세번째 개혁으로 노동당의 정책수립에 노조의 간섭을 최대한 배제했다.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단체의 연합체로 결성된 노동당이 블레어의 개혁을 받아들인 것은 집권을 위해 달리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레어는 95년 노동당 대회에서 사회주의는 국유화나 국가권력이나 정치.경제와 무관한 것이고, 인생의 도덕적 목표,가치관, 사회와 협동에 대한 믿음이라고 역설했다.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민주주의의 사망선고 같은 것이었다.

그런 그는 사회주의자 또는 사회민주주의자라기보다 실용주의적인 중도 정치인이다.

이념적으로 그는 대처의 약간 왼쪽에 있고 클린턴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의 사상의 중심은 공동체다.

인간은 시장에서 경쟁만 하는 고립된 경제주체가 아니라 가정과 사회와 공동체의 구성원이고, 서로 의존하고 협동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 공동체주의자로서의 블레어의 입장이다.

보수당은 18년 장기집권하는 동안 대처리즘이라고 불리는 개혁을 통해 영국병을 많이 치유했다.

그것은 사회복지를 줄이고 노조의 힘을 빼는 것이었다.

영국 경제는 유럽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지속적인 호황을 누렸다.

그런데도 유권자들이 블레어를 선택한 것은 그를 21세기에 가장 적합한 지도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많은 정치인들과 달리 블레어는 마이너스 이미지를 남기는 일을 하지 않았다.

자칭 '한국의 블레어' 들은 무엇을 갖고 있는가.

큰 비전인가. 깊은 통찰력인가. 블레어가 사회민주주의 기본이념을 과감하게 버린 것 같은 용기인가.

당수와 총재에게 예스와 노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가.

블레어 같이 키에르 케고르와 존 롤스를 읽고, 칸트의 양심의 명령을 공동체사상의 그릇에 담아낼 정도의 지성 (知性) 을 갖췄는가.

'한국의 블레어' 들 세 사람의 나이는 46세, 50세, 55세다.

정치판에서는 젊은 축이다. 그러나 나이만 젊으면 블레어가 되는가.

그들은 파벌정치와 지역정치를 앞장서 실천한 사람들이고, 지연 또는 학연정치의 수혜자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블레어의 조건을 갖춘 차세대 정치인들이 밟고 지나갈 극복의 대상이다.

블레어의 연설집 하나를 봐도 그가 나이가 젊어 블레어가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블레어라는 말이 조크로는 좋아도 진지하게 하는 말이라면 당치 않은 자기도취다.

김영희(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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