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남대문 새벽시장 '유통1번지'명성 옛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25일 오전 3시 서울 남대문 새벽시장에 비친 실물경제는 '영하 10도' 였다.

예전같으면 지방에서 전세버스로 올라와 쇼핑하는 도매상들로 북적거릴 주말 피크타임인데도 상가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점포를 오가는 손님도 알뜰쇼핑에 나선 여성과 심야 나들이를 즐기는 가족들이 대부분이고, 보따리를 둘러멘 도매상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시장 입구에서 8년째 포장마차를 하는 金모 (38.여) 씨는 "보따리를 들고 오가는 손님이 오전 5시까지 끊이지 않았으나 요즘은 3시면 파장 분위기" 라고 전했다.

주차장까지 손수레로 짐을 날라주는 짐꾼 權모 (58) 씨는 "몇달 전만 해도 짐을 한차례 날라주는 데 5천원씩 받아 하루 20만~30만원의 수입을 거뜬히 올렸으나 요즘은 10만원 채우기도 힘들어졌다" 고 푸념했다.

통행로에 좌판을 깔고 먹거리.액세서리.생활용품을 파는 8백여개 노점들이 그런 대로 시끌벅적한 재래시장 분위기를 연출했을뿐 정작 상가에 들어서면 "싸요, 싸" "골라, 골라" 를 외치는 점원들의 호객소리만 요란할 뿐이다.

재래시장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이날 본지 취재팀과 남대문 새벽시장을 찾은 대한상공회의소 김효성 (金孝成) 부회장과 민중기 (閔仲基) 유통이사 등 관계자들은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다" 며 시종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대학생 아들과 쇼핑나온 박경섭 (朴慶燮.51) 씨는 "두시간 동안 돌아다녔지만 물건 사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며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했다" 고 말했다.

金부회장 일행이 맨처음 들른 부르뎅아동복 매장 직원은 "하루평균 1백명에 이르던 새벽 도매손님이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 직후 40~50명으로 줄더니 최근에는 10명도 안된다" 고 들려줬다.

불황이 오래 가고 할인점에 손님을 빼앗기면서 남대문의 주요 고객인 지방 양품점이 속속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상의의 추산에 따르면 전국 1만4천개 양품점중 올들어서만 5천여개가 문을 닫았다.

마산에서 숙녀복 가게를 하는 張모 (38.여) 씨는 "지난해에는 1주일에 두세차례 올라왔으나 요즘은 물건을 가져가도 안 팔려 한번만 온다" 며 "그나마 재고가 자꾸 늘어 걱정" 이라고 한숨지었다.

숙녀복을 파는 '장띠모아' 송진수 (宋鎭洙) 상무는 "새벽 도매손님들은 한사람이 보통 2백만~3백만원어치씩 사갔으나 요즘은 1백만원어치 고객도 흔치 않다" 고 말했다.

매출의 70%를 올려주던 새벽 상권이 위축되면서 시장 상인들의 라이프스타일도 바뀌고 있다.

한 상인은 "덩치 큰 도매가 격감하면서 소매로 매출의 절반을 채운다" 며 "낮 영업에도 신경을 쓰다 보니 하루종일 쉴 틈이 없다" 고 말했다.

지방도매상에게 외상값을 떼이는 점포도 늘고 있다. 점포관리회사인 남대문시장㈜ 관계자는 "외상값 받으려고 지방에 갔다 딱한 사정을 보고 오히려 쌀까지 사주고 올라오는 직원이 많다" 며 "출장비라도 아끼려고 미수금을 포기하는 점포가 비일비재하다" 고 밝혔다.

그는 "남대문시장도 어렵지만 지방경제가 훨씬 심각한 것 같다" 며 '체감경제론' 을 폈다.

이처럼 장사가 안되자 시장내 1만여개 점포중 8백여개가 문을 닫았고 한때 평당 1억원을 호가하던 점포 권리금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한 신발가게 주인은 "직원을 13명에서 6명으로 줄였는데도 임대료.인건비 부담이 힘겹다" 며 "점포를 내놓았으나 입질하는 사람도 없다" 고 말했다.

5백년 넘는 역사를 가진 국내 최대 재래시장으로 서민의 삶과 애환을 간직해온 새벽 남대문시장. 경제위기 이후 실직과 소득감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서민경제' 의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었다.

이종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