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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동의 포도농원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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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추풍령 나들목을 벗어나 상주 쪽으로 접어들면 옛날의 추풍령이 나온다. 지금은 잘 포장된 추풍령 옛길을 넘다 보면 ‘반진계’라는 작은 개울이 나타난다. 옛날, 보부상들이나 유생들은 이 길에서 자주 돈을 털렸기 때문에 여럿이 모여 고개를 넘었고, 무사히 넘으면 반진계 앞에 자리 잡은 돌부처에게 고맙다는 절을 올렸다고 한다. 돌부처를 지나면 바로 상주의 모동 마을이 나타난다.

이 마을의 포도는 알맞은 토질과 일교차가 큰 기후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나는 유기농 단체 활동에 참여한 인연으로 이곳 포도농원에 10그루의 포도나무를 가지고 있다. 다른 농사와 마찬가지로 포도농사도 손이 많이 간다. 여름이 오기 전에 순을 정리하고 어느 정도 영글면 장마가 오기 전에 봉지를 씌워야 병충해가 없고 당도도 높아진다. 이곳의 포도주 공장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는 예약하고 2년을 기다려야 살 수 있다. 공장에서 나온 포도씨로는 식용유를 짜거나 미용비누를 만든다.

농사란 가만히 보니 자연에 대한 간섭이요, 적자생존이다. 봉지를 씌우기 전에 먼저 포도송이를 고른다. 비료를 친 포도나무는 알맹이가 많고 충실하지만 퇴비로 키우는 유기농 포도는 비료로 키우는 포도보다 생산량이 떨어진다. 시원찮은 알맹이들을 솎아내고 송이 전체를 종이봉지에 집어넣고 입구를 오므린다. 한여름 햇볕이 지나면 수확이 가능하다. 포도가 익으면 포도나무 주인들에게 공급한다. 도시에 있는 포도나무 주인들은 포도농사를 돕고, 생산자는 나무 주인들에게 포도와 즙이나 포도주를 제공함으로써 도농 교류가 이뤄진다.

포도농사를 돕는 일은 우선은 즐겁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되다.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면서 나의 영농 생산성을 따져봤다. 내가 도시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거나 집에서 쉬는 것이 편익이 더 높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밑질 것 같은 농사일을 와서 돕는 걸까 생각해 본다. 도농 교류와 생태관광이 농어촌 살리기에 좋다지만 이런 명분 때문에 먼 길을 자주 오기는 힘들겠다. 오히려 아는 사람이 있고, 내 포도나무가 있으며, 또 그 포도나무에서 생산되는 포도를 내가 받아 먹는다는 인연이 나를 포도농원으로 이끌지 않았을까.

나는 이곳 포도농원에 드나들면서 인근 백화산의 자연과 친해졌고, 그 골짜기의 다슬기 맛에 반했으며 황희 정승과 연이 깊은 옥동서원의 품격에 빠져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처음에는 사람과의 인연으로 모동 마을을 찾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농원의 포도나무들과 연을 맺었고, 향토음식에 익숙해지고 드디어는 주변의 자연환경과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포도나무가 완전히 망가지지 않는 한 경제적으로도 내가 출자한 돈에 상응하는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농어촌에는 50대가 청년층에 속할 만큼 젊은 사람이 거의 없다. 젊은이들이 없으니 아이들도 없다. 지난해 1년 동안 어린아이가 1명도 태어나지 않은 면들도 있다. 도농 교류와 생태관광이 활성화되면 농사와 관광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갈 젊은이들이 시골로 다시 모여들지 않을까. 젊은이들이 모여들면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다시 들릴 것이다. 폐교된 학교들도 다시 문을 열 수 있겠다. 도시와 시골이 인연으로 만나고 생태로 지속될 수 있도록 믿음을 쌓고 공을 들이고 싶다.

전재경 자연환경국민신탁 대표

◆약력=동국대학교 법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법학박사), 법무부 전문위원, 한국법제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