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박세리]손흥수의 관전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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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우리도 이제 세계적 슈퍼스타 한명을 배출했다는 자랑스러움이 앞선다. 이번 대회는 한마디로 박을 위해 잘 짜여진 한편의 드라마였다. 연장 초반 박은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초조함 마저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하의 박이 왜 그랬을까 하는 의구심이 자연 앞선다. 모르긴 몰라도 스스로 "이겨야 본전" 이라는 생각을 했을 법하다. 상대는 이기면 좋고 져도 본전인 아마추어였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상태가 초반 난조로 이어졌고 반면 상대는 훨훨 날았다. 5번 홀까지 4타 차의 결과가 이것을 말해준다.

이번 대회는 결과적으로 파 3홀에서 승부가 결정됐다. 박이 4라운드에서 2타 앞선 17번 홀의 그린 미스에 이은 보기로 결국 플레이오프를 허락했던 점이나 연장전에서 4타차의 리드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슈아시리폰의 6번 홀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파 3홀은 비기너도 파를 잡을 수 있는 홀인 반면 프로라도 단 한번실수는 그에 따른 결과를 반드시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블랙 울프 런 코스가 증명했다.

박은 홀을 거듭할수록 긴장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유지하는 듯했다.

위기에 몰릴수록 솟아나는 특유의 냉정한 승부사적 기질이 발동된 것을 읽을 수 있었다. 6번 홀에서 상대의 단 한차례 미스샷을 계기로 상대를 압박해 들어갔다.

박이 승부를 뒤집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기본체력을 바탕으로 한 정신력의 개가라고 할 수 있다.

정신력도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박이 끝까지 일정한 템포를 유지하면서 완벽한 스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체지방을 제거한 전체적인 체력관리 때문이다.

후반들어 박이 버디 - 버디로 안정을 찾은 반면 슈아시리폰은 어이없는 슬라이스 (14홀) 를 낸다거나 결정적 찬스였던 18홀 칩샷을 어이없이 미스한다는 등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진 모습을 나타냈다.

이같은 실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체력저하가 제일의 원인이다.

승부의 백미는 18번 홀 상황이었다.

"골프란 이런 것" 을 웅변해 주었다. 볼이 워터 해저드 턱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상황에서 박은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그린을 직접 공략하려는 듯한 동작이 역력했다.

노련한 그의 캐디는 안전한 레이업을 요구했다. 결국 박은 레이업을 선택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박이 양말마저 벗고 물 속으로 들어갈 때 웃음기 띤 얼굴로 초컬릿을 먹으며 여유를 부렸던 슈아시리폰은 칩샷 미스로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말았다.

승리의 여신은 절대절명의 순간에서 기사회생한 박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드라마는 끝났다.

손흥수 (안양베네스트GC 수석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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