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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보호법과 시장의 역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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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미국에 대공황 쓰나미가 덮치던 1929년 12월.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제조업·건설업 등 주요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을 백악관 회의에 불렀다. 주식시장이 붕괴하면서 국민이 패닉에 빠질 때였다. 계획경제의 신봉자였던 그는 이럴 때일수록 근로자들이 피해를 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집착했다.

“종업원들의 임금을 삭감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서슬퍼런 압박에 최고경영자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상공회의소를 통해 임금 조정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약속했다. 하지만 시장은 나날이 악화일로였다. 상품은 팔리지 않고, 적자가 쌓이면서 기업의 부실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결국 기업들은 1년도 안 돼 후버와의 약속을 깰 수밖에 없었다. 1년 전의 예상보다 더 큰 폭의 해고와 임금 삭감이 잇따랐다(진 스마일리, 『세계대공황』). 시장은 후버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움직인 것이다. 약자를 위한다는 정책이 오히려 국민에게 더 큰 고통을 주었다. 후버는 시장의 역습에 톡톡히 당한 셈이다.

비정규직 보호법도 비슷한 처지다.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는 선의가 오히려 비정규직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대량 해고의 시한폭탄은 째깍째깍 돌고 있다. 정규직과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임금 등에서 차별받는 비정규직을 보호하자는 명분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래서 비정규직을 2년 이상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법이 화려하게 등장했다.

하지만 이런 착한 뜻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내지는 않는다. 경제가 착했다면 숱한 갈등과 고민은 생기지도 않았을 게다. 기업이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건 이유가 있어서다. 이윤이라는 저울의 눈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기업의 생리다. 일자리는 줄었는데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다면 싼 비용으로 좋은 인력을 고용할 기회다. 비정규직은 이런 토양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직원을 채용할 때 더 많은 부담을 지라고 우격다짐하니 기업은 "그렇다면 사람을 안 뽑겠다”며 싸늘하게 반응하는 거다. 우리는 이런 시장의 역습을 여러 번 겪었다. 2006년 말 정부는 최저임금제법 시행령을 고쳐 아파트 경비원들을 최저임금제 적용 대상에 넣었다. 고된 일을 하는 이들의 처우를 개선하자는 착한 마음에서 나온 개정안이다. 그렇지만 돌아온 건 경비원의 대량 해고였다. 경비원 월급에 부담을 느낀 아파트 부녀회가 경비원의 수를 확 줄였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보호법도 처음부터 결말이 뻔히 보였다. 그런데도 여야와 노동계는 공모해 사실상 사기 행각을 벌였다. 이제 첫 단추부터 제대로 끼워야 한다. 유예기간을 몇 년으로 할지, 지원금을 얼마로 할지는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시장은 이미 이 법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비정규직을 보호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보호법이 과연 필요한가. 차라리 여야와 노동계는 진흙탕 싸움을 벌이지 말고 일자리 만들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게 낫다. 일자리가 많이 생겨야 비정규직 문제를 푸는 해법도 나올 수 있다.

김종윤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