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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핵은 동북아 넘어 중동까지 연계된 글로벌 위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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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호 10면

24일 서울 국도호텔에서 열린 ‘북한의 개방: 최근 북한 경제 상황’ 세미나에서 스티븐 해거드(왼쪽 ) 교수가 화상자료를 보면서 설명하고 있다. 가운데는 사회를 맡은 하영선 교수. 신인섭 기자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연거푸 강행해 국제사회와 가파른 대치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북한체제의 후계 문제, 붕괴 가능성, 북핵 해법을 놓고 갖가지 설(說)이 무성하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의 ‘지구넷 21 포럼’(위원장 하영선 서울대 교수)은 24일 서울 국도호텔에서 북한 경제·인권 분야의 권위자인 스티븐 해거드 미 캘리포니아 주립 샌디에이고대 교수를 초청해 세미나를 열었다. 해거드 교수는 탈북자 16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북한은 시장 활성화와 부패 심화로 전통적인 국가관리 시스템이 작동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진단했다. 이어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북핵과 중동 테러 세력의 부활이 서로 연계돼 있는 이슈로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미나에는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홍정욱 한나라당 의원, 전재성 서울대 교수, 임병철 통일부 정책기획관이 참석했다. 다음은 참석자들의 발언 요지.

‘지구넷 21 포럼’ 스티븐 해거드 UC 샌디에이고 교수 초청 토론회

▶ 스티븐 해거드 교수
아이러니컬하게도 북한에서 시장경제가 움트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기근을 겪으면서다. 중앙정부의 배급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민초들이 식량 확보와 생존 차원에서 시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북한 내부의 부패와 식량난은 심각하다. 만성적인 위기다. 탈북자 대상의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1%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아 돈을 벌었다고 답했다. 요컨대 북한 내 국영기업과 협동농장의 전통적 기능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주목할 점은 북한과 중국의 교역 규모다. 대중 교역은 지난해 북한 전체 무역의 45%를 차지했다. 북한이 중국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고 있다.

북한은 남북 교류는 물론, 대중 교역에서도 철저히 국영기업 대 국영기업 간의 거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의 포용정책이 북한에 미치는 영향에 한계가 있는 이유다. 개성공단은 한국이 북한을 좀 더 개방시켜 남한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이 됐다. 당초 남측 의도와 정반대다. 북한은 정치적으로 이득이 된다면 경제적인 혜택을 희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조금씩 개방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하려는 나라는 체제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나라, 즉 중국과 중동 국가들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최근 보이는 강경한 대북 자세는 ‘부시 행정부 1기’를 연상시킨다. 그 배경은 이렇다. 미국은 북한이 미얀마·이란·시리아 같은 나라 또는 헤즈볼라·하마스 같은 테러조직에 무기를 수출하는 것을 우려한다. 테러 세력의 부활이 오바마 행정부엔 가장 심각한 문제다.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북핵 이슈는 동북아만의 이슈가 아니다. 중동 문제의 렌즈를 통해 인식하고 있다. 워싱턴의 대북 인내심은 바닥이 난 상태다. 포용정책이 맞느냐, 압박정책이 맞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항상 두 정책의 혼용은 있었고 둘 중에 하나란 식은 아니다.

북한 상황 놓고 ‘붕괴 직전 vs 안정적’
▶ 이근 교수
북한은 조선왕조와 닮은꼴이다. 조선시대에도 기근이 만연했다. 일종의 독재적 왕조체제였고 백성들의 삶은 북한 주민보다 더 궁핍했다. 5일장 같은 시장 형태도 있었다.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정권의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북한은 아니라는 게 차이 난다. 북한이 핵개발에 나선 이유다.

북한의 국가 시스템은 붕괴했을까. 나는 조선시대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교화소·정치범 수용소 유지, 내부 통제 강화는 역설적이게도 정부 통제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운용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자신이 조만간 사망할 것임을 인식하고 있는 김정일은 조선시대 왕위 계승 같은 세습을 추진하고 있다. 그래서 안정적인 외부 환경이 필요하다.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는 이를 위해 억지력을 과시하려는 조치들로 보인다.

따라서 북핵 해결의 키는 후계 과정과 연계돼 있다. 방법은 포용주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북한에 핵 없이 생존할 수 있다는 모델과 비전, 안전 보장을 해줘야 한다. 한국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 모델을 제시할 수도 있다. 북한이 억지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정권 교체 시도나 강경정책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조선의 형태로 생존할 수 있다. 조선은 500년간 존속했다.

▶ 홍정욱 의원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것에 맞춰 북한 주민의 1인당 연간 소득을 3000달러까지 올려준다는 현 정부의 ‘비핵·개방 3000’ 정책을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 왔다. 비핵·개방 3000에는 세 가지 근본적 오류가 있다. 북핵 포기 시 우리 정부가 주도적으로 경제 지원을 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북한이 원하는 파트너는 미국이다. 둘째 ‘3000달러’는 정권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북한으로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보상이다. 한국이 ‘3000달러’를 달성한 시점은 1980년대 민주화가 정점에 달했던 때다. 북한 정권 입장에선 ‘보상’이 아니라 ‘덫’으로 여겨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실성이다. 북한 주민의 1인당 소득은 300~500달러로 추정되는데, 10년 내 10배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 과거의 두 정부가 펼친 무조건적 지원(햇볕정책)도, 현 정부의 비(非)현실적인 상호주의도 북핵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실현 가능한 남북 상호주의를 적용해야 한다. 인도적 지원을 할 때 분배의 투명성을 요구하고, 개성공단 투자 확대의 조건으로 통행·통신·통관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는 식이다.

▶ 해거드 교수
비핵·개방 3000 정책에는 북한이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등 도발적인 행동을 했을 때 어떻게 하겠다는 고려가 없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미가 직면한 도전은 비핵·개방 3000을 재디자인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한국 정부도 뭔가 하라는 강한 압박을 받고 있고, 워싱턴에서도 ‘대북 빅딜’ ‘대(大)전략’ 같은 해법이 거론된다. 하지만 관건은 어떻게 (협상)프로세스를 다시 출발시키느냐다.

▶ 임병철 기획관
북한의 최우선 정책 순위는 정권 유지다. 안정적인 권력 승계와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 주민을 통제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선 경제 발전과 외부 지원도 부분적으로 포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체제 개혁과 대외 개방으로 이어질 외부 지원을 거부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개방 압력이 덜한 중국과 중동 국가의 자본 유입이 증가하기를 기대한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1874호에 따른 제재가 본격화되면 북한의 대중 의존도는 더 심화될 것이다. 과거에 북한이 체제 안정을 위해 시장경제를 통제할수록 암시장은 더 커졌다. 북한 당국은 엄격한 통제보다 시장 운용 방식을 개선해 주민들의 장마당 활동을 어느 정도 허용해 주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방안을 내놓을 것이다.

포용정책은 위험도 높은 게임
▶ 전재성 교수
해거드 교수는 한국의 포용정책이 정치적인 배경에서 비롯됐고, 상업적이지 않아 실패했다고 말했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성과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평화 분위기 속에 남북 대화가 지속됐고 고위급의 사회·문화 교류도 있었다. 국제사회가 가하는 대북 경제 제재의 부담은 일반 주민에게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해거드 교수가 언급했듯 1990년대 초·중반 북한이 극심한 경제난을 겪을 때 밑바닥에서 장마당 같은 시장경제가 움텄고, 북한 당국은 그 대응으로 2002년 제한된 경제개혁을 실시했다. 이번에도 제재 효과가 본격화되면 주민들은 시장으로 나올 것이고 불법 경제활동으로 연명하려 할 것이다.

▶ 해거드 교수
나는 포용정책이 실패했다고도, 옳았다고도 하진 않겠다. 포용정책은 리스키(위험)한 일종의 게임이다. 물론 어떤 국면에서는 성과를 냈다. 김대중(DJ) 스타일의 포용정책은 실패했지만 남측의 잘못은 아니다. 북한은 남한 기업가들이 북한 곳곳을 뛰어다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남한과 상업적으로 얽히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북한 정권은 DJ식 포용정책의 기대대로 따르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이번에 한국 정부가 북한의 개성공단 임금 인상 요구를 상업적 원칙에 따르지 않고 정치적으로 수용한다면 북한은 계속 게임을 하려 할 것이다.

제재에 대해선 오해가 있다. 이것은 무기 판매 시스템을 겨냥한 조치다. 완전 봉쇄와는 다르다. 어쨌든 이번에도 중국이 마음을 고쳐먹지 않으면 효과는 크지 않으리라고 본다.

한국 정부의 과거 포용정책이나, 현 정부의 비핵·개방 3000 정책의 핵심 개념은 경제 유인책으로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려는 것이다. 북한은 여기에 관심이 없다. 포용정책이든 압박정책이든, 북한이 정말 원하는 것은 미국의 (체제)인정을 받는 것이다. 공식 절차를 통해서 정상 국가로 인정받는 것이다. “미국은 당신들을 주권 국가로 인정한다. 진지한(serious) 상대가 돼 거래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북한은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 특별대표보다 더 고위급의 특사를 원한다. 미국으로선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기회는 있다. 북한에 억류된 여기자 두 명을 위한 석방 협상이 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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