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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내 생각은…

작은 쌀단지서 배우는 나눔의 기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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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저녁 식탁을 준비하는 아내를 바라보고 있자니 재래식 부엌에서 투박한 손으로 뚝딱뚝딱 저녁상을 차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진다. 아내는 계량컵으로 정확히 계산된 4인분의 밥을 짓지만 어머니는 시커먼 가마솥에 대식구의 밥을 지으셨다. 어머니만의 쌀 계량법도 있었다. 커다란 됫박에다 붕긋하게 솟아오르도록 쌀을 푸고 그 고봉을 싹 쳐낸 다음 양철 바가지에 쏟아 붓는다. 그런 다음 바가지에서 크게 한 움큼을 집어내 부뚜막 옆 조그만 단지에 덜어 두는 것이다.

어머니의 오래된 습관이 단순한 절미(節米)가 아닌 나눔의 실천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사실 그 쌀단지의 비밀이 밝혀졌을 때 우리 형제들은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감정이었지만 늘 배가 고팠던 그 시절에 우리 집 쌀이 남의 집으로 새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알고 보니 그 쌀단지는 생계 유지가 어려웠던 이웃집 할머니를 위한 것이었다. 가족들조차 모르게 가난한 이웃에게 쌀을 나누어 주시던 내 어머니의 배려와 지혜는 지금까지도 깊은 울림을 준다.

몇 년 전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현대판 쌀단지’를 연상케 하는 풍경을 보게 됐다. 캐나다의 대형 마트에는 계산대 옆이나 출입구 쪽에 생필품 기부함이 마련돼 있다. 가족이 먹을 음식이나 물품을 사면서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줄 물건도 한두 가지 구입해 기부함에 넣는 것이다. 장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유쾌한 아이디어 아닌가. 나 역시 어머니를 회상하며 천연 벌꿀과 치약을 기부함에 넣고 왔다.

외국을 여행하다 보면 생활 속에서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기부 문화의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대학 서점에서는 책을 사는 학생들에게 영수증과 함께 책 가격의 1%에 해당하는 나무 동전을 준다. 책값을 치른 학생들은 각기 다른 기부처가 적힌 4개의 상자 중 자신이 넣고 싶은 곳에 동전을 넣는다. ‘아프리카에서 굶주리는 아이들의 한 끼 식사가 해결되겠지’ 혹은 ‘늪지대에 사는 희귀동물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어려운 이웃과 환경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훌륭한 ‘나눔 장치’인 셈이다.

굳이 멀리서 찾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각양각색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다. 젊은 세대는 신용카드 포인트나 인터넷 머니를 기부하는가 하면, 직장인들은 월급의 우수리를 떼어 결식 아동이나 혼자 사는 노인을 돕는다. 특별히 시간을 내지 않아도, 거액을 들이지 않아도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 나눔은 그렇게 작고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박세준 한국암웨이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