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다큐멘터리 조작된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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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5월 방영된 KBS의 '자연 다큐멘터리 - 수달' 은 분명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수작이었다.

'달식' 과 '달미' 라는 수달 두 마리의 자연생활을 생생히 보여줌으로써 생태계 보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감동적으로 보여 줬다.

어느 날 달미가 동굴에서 숨을 거둔다. 달식은 낙엽을 덮어 주며 애통해 한다. 이 장면에 이르면 시청자들은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모두 연출자에 의해 기획.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우선 등장 주인공이 현지에 살고 있던 수달이 아니라 경북의 한 동물보호가로부터 빌린 보호용 수달이었다.

여러 차례 닭장에 수달을 싣고 강원도로 옮겨 철조망을 치고 그 속에 조작된 환경을 만든 것이다.

천연기념물 330호인 수달은 폐쇄공간에서 살기 어렵다. 이후 한 마리가 병들어 죽는다. 담당 PD는 죽은 수달과 산 수달을 다시 촬영현장으로 옮겨 감동적 장면을 연출했다고 한다.

수달과 자연생태계를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로 제작된 다큐멘터리 프로가 결과적으로는 수달의 씨를 말리고 시청자들을 우롱한 해프닝으로 끝나 버렸다.

의문을 제기한 제보자가 많았지만 방송국은 둘러대기에 바빴다.

어떤 형태의 보도든 사실보도가 생명이다. 특히 현실상황을 보도.고발하는 다큐멘터리 프로는 있는 대로의 현상보도에 충실해야 함은 기본철칙이다.

아무리 시청률 경쟁이 치열하다 해도 지킬 것은 지켜야 했다. 또 잘못을 알고서도 진상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려 했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지난 80년대 일어났던 워싱턴 포스트의 '지미의 세계' 나 일본 아사히신문의 '산호초 사건' 이 수달 사건과 유사하다. 흑인소년의 마약복용을 충격적으로 보도하고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지미의 세계나 바닷속 산호초에 사람 이름을 적어 놓고 그 장면을 보도하면서 인간의 자연훼손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고발했던 산호초 기사는 신문사 자체조사에서 기자의 조작임이 드러났다.

당장 사과문이 나오고 사장.편집국장 등 간부가 회사를 떠났다. KBS의 깨끗한 마무리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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