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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설계사 블랙리스트 나올 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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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수당 선지급 제도로 보험업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보험설계사가 계약을 따내면 지급하는 모집수당을 한꺼번에 지급하는 이 제도를 악용하는 설계사가 늘면서 시장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관련 소송도 난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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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5월 중순. D생명보험사 설계사 3명이 경찰에 구속됐다. 죄목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서울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이들이 친인척과 동창생 명의를 빌려 보험계약을 체결한 후 고객 모집수당을 받는 수법으로 총 271건, 10억5000만원 상당을 편취했다.

한꺼번에 모집수당 60~100% 주는 선지급제 논란 … 보험사 외형경쟁 속 변칙 가입 만연 #세계 7위 보험시장의 그늘

본지 취재 결과 이들은 지난해 D생명에 입사하자마자 대졸 남성 설계사 조직에서 실적 1~3위를 차지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3~9월간 윤모씨는 117건, 정모씨와 진모씨는 각각 83건, 71건의 모집실적을 올렸다.

그렇지만 베테랑은 아니었다. 진모씨는 경력 2년이 조금 넘었고, 윤모씨는 경력이 1년도 안 된 새내기였다. 문제는 ‘작성계약’으로 불리는 허위 실적이었다. 이들은 회사로부터 지급받은 거액의 수당을 한 통장에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 측에 따르면 이들을 관리한 세일즈 매니저도 이 사실을 몰랐다.

#2. 한 외국계 생명보험사에서 일하는 설계사인 A씨는 전 보험사에서 수년간 실적 톱10에 들던 베테랑이었다. 그는 지난해 말 새로 회사를 옮긴 후에도 줄곧 거액의 계약을 따내 수억원의 모집수당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A씨가 맺은 계약이 줄줄이 해지되면서 허위 계약임이 밝혀졌다.

지인들 명의로 든 보험료를 A씨가 대납해 오다가 더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A씨에게 수당 환수를 통보했다. 불똥은 담당 지점장과 세일즈 매니저에게도 튀었다. A씨가 계약을 따내면 수당의 15%를 세일즈 매니저가 받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이 세일즈 매니저에게 지급됐던 수당도 모두 환수 조치됐다.

#3. 연초 한 대형 보험법인대리점에 입사한 B씨는 보험영업 자격 코드가 나오기 전 상사인 세일즈 매니저 이름으로 수십 건의 보험 계약을 따냈다. 모두 허위 계약이었다. B씨는 회사로부터 10억원 가까운 수당을 지급받았다. 받을 모집수당의 80%를 한꺼번에 탄 것이다.

작성계약 업계에 만연

하지만 A씨는 수당만 챙긴 후 해외로 도주했다. 계약은 당연히 모두 해지됐다. 이름을 빌려 준 세일즈 매니저는 B씨가 갖고 도주한 수당 대부분을 환수해야 할 처지가 됐다. 한 보험설계사는 “허위 계약을 통해 거액의 수당을 받는 일부 수퍼 보험설계사의 담당 세일즈 매니저는 사실상 폭탄을 안고 사는 셈”이라고 말했다.

#4. 지난해 말 국내 한 생명보험사는 대졸 남성 설계사로 조직된 보험설계사 채널에 대한 자체 내부감사를 진행했다. 허위 계약이 많다는 내부 제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한 지점의 경우 지난 1년간 실적 중 70% 정도가 작성계약이었다. 이 회사는 종신보험의 경우 1000%의 수당을 선지급했다.

월 100만원짜리 종신보험을 계약하면 다음 달에 1000만원이 보험설계사에게 지급된 것이다. 이 회사의 한 지점장은 “작성계약은 업계에 만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5. 미래에셋생명은 퇴직 설계사 135명과 집단 소송 중이다. 회사 측의 선지급 수당 환수조치 방침에 설계사들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말 국내 다른 보험사도 퇴직 설계사와 회사 사이에 수당 환수조치를 놓고 소송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결과는 퇴직설계사들이 승소했다. 이 회사 전직 설계사는 “선지급 수당과 초기 정착금에 대한 환수와 관련한 규약도 없었을 뿐 아니라, 통보 받은 적도 없었다”고 밝혔다.

수당 선지급제도의 폐해가 보험업계에서 통제 불가능 상태로 치닫고 있다. 보험설계사의 모집 수당을 미리 지급하는 이 제도는 2000년 초 외국계 보험사를 중심으로 도입돼 지금은 업계 전반에 정착된 급여 체계다. 보험회사 측은 보험 계약을 따낸 설계사에게 1년 이상 계약이 유지되는 것을 전제로 전체 수당 중 60~100%를 한꺼번에 지급해 왔다.

이후 계약이 유지되지 않거나 문제가 생기면 이를 환수하는 방식이다. 생명보험협회에 따르면 2008년 회계연도 상반기(4~9월)에 선지급한 수당은 1조7600억원으로 전체 지급수당의 35%였다. 문제는 6~24개월에 걸쳐 나눠 수당을 지급받는 기존 방식에서 ‘과도한 선지급’으로 체계가 바뀌면서 수당만 챙기고 계약을 유지하지 않거나, 작성계약이 크게 늘어난다는 데 있다.

수당만 챙기고 회사를 옮기는 소위 ‘먹튀 설계사’도 급증했다. 일부 보험사는 조직 규모를 늘리기 위해 이런 먹튀 설계사의 환수금을 대납해주거나 초기 정착금을 지원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수당 노린 허위계약 많아

국내 대형 보험사의 한 지점장은 “수당 선지급제도가 퍼지면서 설계사 이직률이 급증하고, 계약 유지율이 현격히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설계사가 다른 사람 명의로 계약을 하고, 보험료를 자신이 대납하는 작성계약이 지나치게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금융당국이 나섰다. 금융감독원은 현재 보험회사 모집질서 준수 수준에 대한 평가작업을 하고 있다. 불완전판매 비율, 계약해지율, 이직 설계사 비율 등을 조사해 조치하겠다는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6월 안에 평가를 마친 뒤 업계에 미치는 파장을 고려해 결과를 공개할지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금감원이 이런 조사에 나선 것은 청약철회, 품질보증 해지 건수가 급증하고, 설계사 이직률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등 보험시장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업계 관계자는 “외국계 보험회사가 ‘설계사 정착률 1위 보험사’라는 것을 TV 광고 전면에 내세울 만큼 설계사 이동이 잦다”고 말했다.

사실 수당 선지급 제도 그 자체가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경희 보험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영업직원을 통해 고객을 확보하는 보험사 특성상 선지급은 업계 고유의 특성”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위원은 “국내 시장에서 수당 선지급 제도가 문제되는 것은 제도 자체가 아니라 이를 악용하는 판매 채널이 늘어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보험연구원 서대교 연구위원은 “이 제도는 영업을 독려하기 위한 정상적인 인센티브 제도”라며 “수당 선지급이 과도하다고 말하는데 회사 차원에서 감당할 수 있다면 전혀 문제가 아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외국은 어떨까? 서대교 연구위원은 “기본적으로 문화가 다르다”고 했다.

그는 “외국의 경우 보험설계사가 어떤 문제로 신뢰를 잃어버리면 그걸로 끝이고 다시는 영업을 할 수 없다”며 “이런 문화가 설계사 스스로 자정하고 강제하는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이 점이 핵심이다. 국내에서는 보험설계사가 사고를 쳐도 회사만 옮기면 새로 영업 코드가 나오고 버젓이 보험 영업을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수당 선지급제 시스템을 고칠 것이 아니라 감독을 강화하고 만연한 불완전 판매를 완전판매 시장으로 옮길 수 있는 현실성이 있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금융당국과 보험업계에서는 불량 보험설계사 정보를 공유하는 방안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 대형 보험회사의 임원은 “채용할 때 과거 전력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며 “이직이 잦고 수당 미환수나 불완전 판매로 문제가 된 설계사 정보를 협회 차원에서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소위 ‘불량 설계사 블랙 리스트’가 나올 참이다. 세계 7위 규모라는 한국 보험시장의 현주소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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