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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 정주영회장이 보여준 승부사 기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정주영 (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의 이번 '소떼몰이 방북' 은 鄭명예회장의 독창적이고 '엔터테이너' 적인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또 한 편의 드라마였다.

15일 밤11시 5백마리의 소떼가 서산농장을 떠나면서부터 4월말부터 예고됐던 이 '드라마' 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았다.

서산 - 홍성 - 예산 - 천안톨게이트 -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임진각에 도착한 16일 오전6시까지 소들이 지나는 길목마다 늦은 밤, 이른 새벽인데도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나와 손을 흔드는 기이한 광경이 연출됐다.

이 장면은 또 신문과 TV를 통해 생생하게 전 세계로 전달됐다.

이 '희대의 엔터테인먼트' 는 올해 83세인 정주영 (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의 '창작품'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번 이벤트의 구상에서부터, 각색, 연출을 총 지휘한 것은 물론 자신이 주역까지 맡았다.

이번 이벤트가 구체화된 것은 지난 4월말. 鄭명예회장이 북한 방문을 추진하며 북측에 방북선물로 농사용 소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면서부터다.

서산농장 관리소장은 "鄭회장께서 93년 농장에 소 1백50여마리를 사주며 방목하라고 지시한 뒤 매일 새끼를 몇마리 낳았는지, 소 몇마리가 아픈지 등에 대한 보고를 들어왔다" 고 말했다.

그는 "왜 소들을 방목하느냐고 묻자 회장께서 '앞으로 큰 일에 쓸 소들이니 잘 보살피라' 라고 말했다" 며 "이미 그 때부터 이런 원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고 덧붙였다.

또 鄭회장은 더 많은 소를 고향에 선물하기 위해 인공수정을 하라고 지시해 이번에 북송되는 소중 1백여마리는 임신한 상태라는 것. 이 때문에 이 소들은 수송에 앞서 유산방지 주사를 맞았다.

이날 북송된 소의 가격은 모두 8억7천여만원대. 이 정도의 비용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서 눈길을 끌었다는 점에서 鄭명예회장의 뛰어난 엔터테이너 기질은 또 한번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의 엔터테이너적 기질이 발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보통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한국 제일의 기업을 일구는 과정에서 임기응변과 독창적인 일처리로 수차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무수한 화제거리를 낳으며 명성을 날렸다.

6.25전쟁중에 아이젠하워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한겨울에 유엔군 묘지를 푸르게 가꾸라는 미군의 요청에 따라 보리밭을 떠다가 묘에 입힌 일로 현대건설이 미군공사를 독점하다시피 한 것은 유명하다.

또 조선소 도크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로 배를 수주하고, 5백원짜리 지폐에 찍혀있는 거북선을 들이대며 외국에서 조선소건설 차관을 들여온 일, 서산간척지 마지막 물막이 공사에 폐 (廢) 유조선을 가라앉혀 거센 물살을 막아낸 일 등 무수히 많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이벤트를 수없이 연출했던 정주영명예회장. 그의 다음 작품은 무엇이 될까.

양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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