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위험하다]6.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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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사장이 바뀌었으니 이제 교과서를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일본방송에서 BBC로" .지난 3일 발행된 KBS '프로듀서 협회보' 에 실린 글의 한토막이다.

박권상 신임사장의 취임 일성이 "BBC 지향" 이었음에 빗대어 우리 방송의 표절 실태를 고백한 PD들의 토로다.

문화의 생명은 독창성이다.

독특한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포기하는 순간 더 이상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문화계는 전 분야에 걸쳐 표절과 모방에 관한 추문에 휩싸여 있다.

미술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이 외국 작품과 거의 구도가 같은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일었는가 하면, 신문사 신춘문예 당선작에서 기존 소설과 같은 대목이 발견돼 당선이 취소된다.

오페라 무대 구성을 베끼는 것 또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대학 교수의 논문과 저술의 표절도 종종 문제를 일으킨다.

상대적으로 외국 경험이 풍부한 문화.예술인들이 거기서 본 작품들을 베껴 마치 자기의 창작물인양 내세우던 행태. 그러나 80년대 들어 일반인들의 해외 체험이 풍부해지면서 실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심각한 곳은 대중문화계. 일본 교토 (共同) 통신 히라이 히사시 (平井久志) 서울지국장은 "문화분야 중에서도 특히 방송과 광고의 표절이 심각하다" 며 "약 3년전 일본에서 봤던 방송프로.광고와 비슷한 것들이 너무 많다" 고 밝혔다.

일본의 음악전문가 고다이라 다케시 (小平武司) 는 "한국 문화계는 전반적으로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면서 "이런 점에선 아직 후진국" 이라고 진단했다.

대중문화계의 일본 표절은 비단 양심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의 취향을 일본화해간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하다.

한 방송 작가의 고백 - "개편을 앞두고 PD와 함께 일본에 가서 TV를 보며 베껴오곤 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정서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이 우리는 이미 일본적인 감동에 눈물을 흘리고 일본적인 느낌에 즐거워합니다" .

그의 분석이 적용되는 예는 현재도 찾기 어렵지 않다.

주말 황금시간대에 노인들을 모셔 퀴즈를 푸는 등의 시도로 "발상이 참신하고 감동적이다" 는 찬사를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SBS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 .하지만 이 프로도 일본 것을 모방한 것이다.

표절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다.

한 때 방송들이 표절가요에 대해 방송금지를 내리며 감시역을 자임했다.

문제의 가수들이 해체.활동중단 선언을 하는 등 분위기 쇄신 조짐도 일었다.

하지만 베끼기를 일삼는 방송사가 다른 분야의 표절을 얘기하는 것은 애초 정당성을 갖지 못했다.

결국 지금은 흐지부지된 상태. 이 지경까지 온 데엔 감시임무를 방기한 방송위원회의 책임이 크다.

96년 방송개발원이 일본 TV를 집중분석해 고발했는가 하면 심지어 MBC의 옴부즈맨 프로 'TV속의 TV' 조차 스스로 표절 프로들을 잡아냈지만 방송위원회의 징계는 없었다.

이젠 표절 관행 근절을 일본에 기대해야 할 형편이다.

일본 후지TV의 한 관계자는 "한국 방송의 표절이 심각하다는 것을 잘 안다" 면서 "95년 KBS에 한 번 경고서한을 보냈더니 해당 프로를 바로 폐지하더라" 고 밝혔다.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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