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호흡기는 떼냈지만 … 존엄사의 역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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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분석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겠습니다.”

23일 오전 10시20분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본관 1508호실. 침묵을 깨고 김모(77·여)씨의 주치의 박무석(호흡기내과) 교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김씨에게서 인공호흡기가 제거됐다. ‘꼬르륵’ 김씨가 숨을 한 번 몰아 쉬었다. 오전 10시38분 김씨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주치의 박 교수는 이후 “감정을 느껴 눈물을 흘린 게 아니라 눈을 잘못 감아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 가족들이 법원에 호흡기 제거 소송을 낸 지 13개월 만에 호흡기를 뗀 것이다.

하지만 호흡기를 떼면 길어야 3시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김씨는 스스로 숨을 쉬면서 살아 있다. 호흡과 맥박·혈압·체온이 정상이다. 박 교수는 “뇌간과 대뇌가 손상된 상태지만 호흡기를 떼기 전에도 자발(自發) 호흡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김씨의 호흡(들숨과 날숨) 강도가 정상보다 약하기 때문에 기관지에 가래가 쌓여 오래 살지는 못할 것”으로 추정했다. 일본에서는 2월 60대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자 13분 만에 숨졌다. 미국에서는 1975년 법원 판결에 따라 21세 여자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했지만 10년을 더 살았다.

김씨의 생존 기간이 길어지면 진단이 달라진다. 세브란스병원의 존엄사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지금은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는 식물인간(2단계)이지만 앞으로는 스스로 호흡하는 식물인간(3단계)으로 중증도가 낮아질 수 있다. 이럴 경우 대법원이 판단한 김씨의 상태가 달라진다. 대법원은 지난달 판결에서 “김씨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회복 불가능이라는 평가는 맞지만 사망의 단계에 진입했다는 평가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서 존엄사 허용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세브란스병원은 대국민 발표문에서 “대법원의 판결과 가족들의 뜻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제거했지만 인간의 생명을 거두는 존엄사는 억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23일 성명에서 “ 환자가 존엄사를 선택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도록 공증 절차와 방법 등을 (존엄사 법안에) 추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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