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23) 김애란→ 황정은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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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애란씨가 “세상 사람들이 전부 이상하게 봐도 황정은씨만은 끄떡하지 않으리”라 쓴 건 두 사람이 사적으로 돈독한 문우라는 뜻이 아니다. 황씨의 소설에 대한 믿음을 말한 게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세계의 한 부분을 썰어 손바닥 위에 놓고 바라본다. 네모난 조각 속, 대리암 무늬가 기이하고 아름답다. 돼지머리편육이 돼지와 하나도 닮지 않은 것처럼, 그것은 세계와 전혀 닮지 않은, 그러나 엄연히 세계의 일부인, 현실의 단면처럼 보인다. 두꺼운 평면이자 얇은 입체. 수분 많은 고체이자 점도 높은 액체.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문학동네, 2008)를 읽으며 떠오른 생각이다. 물에 떠 도화지에 바로 옮길 수 있는 유성물감이 아닌, 핏물을 빼 오래 누른 고기 속 마블링. 그 무늬가 추상적이고 그 정서가 퍽 구체적으로 맛있다. 환상은 부유하지 않고 현실 역시 고착되지 않는다.

황정은의 소설에는 비현실적인 상황이 자주 나온다. 아버지가 모자가 되거나, 사람 등에 갑자기 문이 생긴다거나, 모기가 말을 한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다. 소설 속엔 고통과 엉뚱함이 섞여 있되 어지럽지도 부산하지도 않다. 오롯이, 단정한 듯 쓸쓸해 애잔한 딴청이랄까. 담담하게 잘 굳은 환상. 밝은 회색, 투명한 젤라틴. 인상적인 것은 작가가 환상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단편집의 시큰둥한 명랑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얘기들이 회자됐으니, 여기선 개인적인 경험을 적는 일로 감상을 대신할까 한다. 단편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에도 동물 이야기가 나오지만, 나 역시 동물원에 가면 오래 보고, 편애하는 짐승들이 있다. 주로 혼자 있고, 덩치가 크며, 무뚝뚝한 녀석들이다. 언젠가, 몸통에 비해 몹시 작은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수족관 귀퉁이서 뭔가 전달하려는 듯 지느러미를 팔랑이며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곁에 있던 친구에게 가 귓속말을 했다.

“저 녀석은 사랑이 뭔지 아는 것 같아.”

그리고 위로가 되는 두 가지.

하나는 단편 ‘문’ 속에서 죽은 할머니와 손자의 대화.

심심하겠어, 할머니.

그래서 가끔 걷는다.

뭐가 있어?

없다. 그래서 조금 더 걸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 어느 날 내가 오뚝이가 되어, 세상 사람들이 전부 이상하게 봐도 황정은씨만은 끄떡하지 않으리라는 것. 친절도 배려도 아닌 무심함으로 나를 어제 만난 사람처럼 대해주리라는 점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러한 종류의 덤덤함을 오래 전부터 그리워했다는 걸 알게 되리라. 그땐 나도 커피 글라인드를 들고 뒤뚱거리며 황정은씨 댁으로 놀러가야지. 그리고 그녀가 농담을 하면, ‘딸랑’ 소리를 내며 물어봐야겠다. “정은씨, 지빠귀는 정말 짓빠 짓빠 우나?” 그러니 내 소설과 문장 끝에 아무 것도 없다 해도, 나 역시 조금 더 걸어볼 생각이다.

◆김애란=1980년생. 2002년 대산대학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2005년 최연소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은 이래 이효석문학상·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잇따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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