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 외국, 경영판단 잘못 형사처벌 못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선진국에서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부실기업의 경영자에게 책임을 물을 때 기업부실의 원인이 경영자의 능력부족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불법행위 때문인지를 철저히 구분해 처리하고 있다.

경영능력 부족에 따른 기업부실의 경우 경영자를 형사상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선진국들의 보편적 시각이다.

자본.경영이 철저히 분리되는 시장경제에서 전문경영인의 의사결정 잘못으로 인한 부실 책임은 주주.채권자 등 해당 기업의 이해당사자들이 당연히 감수할 몫이지 공권력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경영자의 불법행위로 인한 기업 부실의 경우는 실정법에 따라 관계자들을 사법 처리하고 있다. 사기.배임.횡령.뇌물수수 등 불법행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추상적이고 막연한 규정은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법률 조문의 확대.유추해석을 통해 도덕적.민사적 문제를 형사문제로 비화시키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지난 89년 미 정부가 취한 저축대부조합 (SL) 부실 파문의 처리과정은 선진국들의 부실기업 처리원칙이 확연히 드러난 대표적 사례다.

당시 부동산가격 폭락으로 인한 자산 디플레로 무려 7백74개의 저축대부조합들이 부도를 내고, 돈을 빌려준 은행들마저 연쇄 도산의 위기에 처하자 미 정부는 경제공황을 막기 위해 1천8백억달러라는 막대한 재정자금을 쏟아부어 은행 구제에 나섰다.

혈세 (血稅) 를 풀어 부실 금융기관을 구제한다는 여론의 비난이 빗발쳤고 궁지에 몰린 조지 부시 대통령은 미 연방수사국 (FBI) 를 동원, 저축대부조합 부실화 과정을 철저히 파헤쳤다.

그 결과 1천여명의 조합 경영자들이 사기.횡령 등 각종 죄목으로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됐다.

하지만 실정법에 어긋나지 않는 단순한 경영판단 잘못은 처벌되지 않았다.

일본의 경우 지난 95년 도쿄교와 (東京協和).안젠 (安全) 상호신용조합이 1천5백억엔의 불량채권때문에 도산했을 때 두 조합의 이사장을 사법 처리한 예가 있다.

부실의 주요 원인은 부동산값 거품붕괴에 있었지만 두 사람의 사법처리 사유는 배임.불법융자 등이었다.

영국 중앙은행은 지난 95년 베어링스그룹이 불법적 파생금융상품 거래로 주주들에게 14억달러의 손해를 입히고 파산하자 베어링스를 네덜란드의 금융그룹 ING에 단돈 1파운드를 받고 넘겼다. 부실 경영의 책임을 경영진뿐만 아니라 주주에까지 지운 것이다.

그 결과 주주들은 투자금을 모두 날렸고 피터 베어링 회장과 앤드루 터키 부회장은 빈털터리가 됐다.

철저한 시장경제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경영진과 이해당사자에게 형사처벌이나 재산몰수와 다름없는 혹독한 처벌을 가한 셈이다.

임봉수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