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무의미한 ‘경기냐, 물가냐’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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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세계경제가 회복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경기냐, 물가냐”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스트로스칸 총재가 이번 경기침체가 끝난 뒤 “급속한 인플레이션이 세계경제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미국 장기국채금리가 상승 움직임을 보이면서 중앙은행들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주 일단 ‘금융 완화’ 기조를 유지하는 선에서 논란을 일단락했지만 불씨는 계속 남아 있는 것 같다.

성장과 안정은 어느 나라 경제정책 당국자들이건 가장 커다란 숙제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경제학계에서도 가장 큰 논쟁거리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특히 세계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례 없이 많은 돈이 풀려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성장과 안정은 어느 때보다 어려운 정책과제로 다가와 있다. 그렇지만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앙은행의 최종 책임은 물가안정”이고 “정부는 성장을 우선한다”라는 식의 편가름은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정부건 중앙은행이건 성장과 안정의 조화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마치 두 기관 간에 독자적인 영역이 있는 듯이 얘기하는 것은 별 근거 없이 우리 사회에 횡행하고 있는 또 다른 신화(神話)다.

‘글로벌 스탠더드’인 듯이 얘기되는 미국의 경우를 보자. 연방은행법(Federal Reserve Act)에 명시돼 있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첫째 목적은 ‘최대한의 고용(maximum employment)’이다. 둘째 목적이 ‘물가안정(stable prices)’이고, 셋째 목적이 ‘적절한 장기이자율(moderate long-term interest rates)’이다. FRB는 성장과 안정의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쫓도록 설계돼 있는데, 물가안정보다 오히려 성장 쪽에 무게 중심이 두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잉글랜드은행은 영국 재무부와 불가분의 관계다. 형식적으로는 독립돼 있지만, ‘특수한 상황’에는 재무부가 잉글랜드은행에 ‘명령(order)’할 수 있는 권한을 유보하고 있다. 영국에서 재무부와 잉글랜드은행 간에 이견이 표출되는 적은 거의 없다. 잉글랜드은행의 목적도 물가안정과 정부정책지원, 즉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으로 돼 있다. 중앙은행 독립의 표상이라고 흔히 얘기되는 독일의 분데스방크는 세계적으로 보면 오히려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히틀러 치하,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하이퍼인플레라는 독특한 역사를 겪었기 때문에 물가안정을 최상의 과제로 내세우는 중앙은행을 별도로 만들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분데스방크식 중앙은행을 선호하는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한편 유로화를 떠받친다는 특수한 목적 때문에 물가에 중점을 둔다.

영미와 유럽대륙 간 중앙은행 성격의 차이는 불경기에 대처할 때에 뚜렷해진다. 미국과 영국의 중앙은행들은 경기가 나빠질 때에 재빨리 확장정책으로 전환한다. 반면 ECB는 대응이 많이 느리다. 그래서 이번 세계 금융위기에서 탈출하는 것도 유럽대륙보다 미국이나 영국이 더 빠를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는 전문가들도 있다.

경제의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성장과 안정을 기관들의 영역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갑자기 환율이 오르거나 원자재 가격이 올라서 물가가 올라가는 것은 돈이 많이 풀렸는지 적게 풀렸는지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과제다. 인플레 목표만을 지키겠다고 돈줄을 죄면 경제가 더 어려워진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함께 경기를 유지하면서 물가가 크게 불안해지도록 하지 않는 중간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경제를 자꾸 나누어 보는 것에는 물론 ‘기관 이기주의’도 개입돼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서양의 분석적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에 너무 팽배해서 무엇이든 쪼개봐야만 ‘과학적’인 양 생각하는 경향 탓도 큰 것 같다. 그러나 경제는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다. 작은 부분이라도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다. 각 기관들에 주어진 목표와 수단은 다르더라도 내놓는 경제정책은 전체를 고려해서 종합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중앙은행은 통화량·금리·외환보유액 등의 수단을 써서 어떻게 하면 ‘성장과 안정’을 함께 이룰 것인가를 생각하고, 정부는 각종 경제정책뿐만 아니라 사회정책 수단까지 사용해서 ‘성장과 안정’을 어떻게 하면 함께 달성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