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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층, 600년 전 영국 농민 대규모 반란 ‘정치 꼼수’로 진압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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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1381년에 일어난 ‘와트 타일러(Wat Tyler)의 난’은 영국 역사상 가장 격심한 농민 반란이었다. 반란의 직접적 원인은 종래의 재산 정도에 따른 누진세 대신 균등한 인두세(人頭稅)를 전국적으로 거둬들이려 한 데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쌓였던 경제적 불만이 마침내 폭발했다. 와트 타일러가 이끄는 반란군은 6월 13일 런던을 장악했다. 그날 밤 나이 14세의 리처드 2세는 런던탑에 올라 농민들의 함성과 불길을 내려다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왕은 이튿날 군중과 만났고 요구조건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의 양보에 만족한 많은 농민이 이탈했다. 세력이 약해진 타일러의 추종자들은 6월 15일 왕 및 그의 수행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새로운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잠시 가시 돋친 언쟁이 오간 뒤 런던 시장이 농민들의 눈앞에서 지도자 타일러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그림 왼쪽 아래).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데다 순진하게도 왕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반란군은 곧 뿔뿔이 흩어졌다. 이를 틈탄 귀족들은 군대를 조직해 반란을 일으킨 마을들을 야만적으로 유린했다. 일단 자신의 생명이 더 이상 위협받지 않게 된 왕은 모든 약속을 저버렸다.

로마제국 멸망 이래 유럽사에서 평민이 이때처럼 열렬하게 자기 주장을 한 시기는 없었다. 그러나 하층민의 반란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성공 직전에 실패했다. 첫째, 상위 계층은 반란 진압에 필요한 재원과 군대를 쉽사리 동원할 수 있었으며, 권력을 휘두르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한층 익숙했다. 둘째, 하층민들이 직종에 따른 이해관계로 분열되어 있었던 반면 특권 계층은 지배권에 위협을 받을 경우 항상 연합 전선을 펼쳤다. 끝으로 하층민은 공통된 이념이나 장기적 프로그램을 지니지 못했다. 그들의 반란은 착취에 대한 본능적 반발이었고 눈앞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 급급했다. 그들의 투쟁은 거의 승리에 가까워진 순간 와해됐고, 겁을 먹은 만큼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귀족들의 반격 앞에 무력하게 노출됐다.

리처드 2세는 ‘정치적 꼼수’로 위기를 넘겼다. 아직 대중의 정치의식이 성숙하지 못한 600년 전 세습왕조 시절에나 통했던 수법이다. ‘역사의 교훈’을 아는 요즘 시민의 정치 수준은 역사상 최고조에 이른다. 대통령이 진정성을 보여 준다면 납득하지 못할 국민이 아니다. 선거에 의해 정통성을 부여받은, 그것도 530만 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대통령답게 국민 앞에 나서서 당당히 설득할 수는 없는 걸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