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법안’ 유예는 비겁한 짓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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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02면

지금은 노무현 정부가 다 잘한 듯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특히 경제가 문제였다.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니 경무대(경제를 무서워한 대통령)라는 얘기가 회자되기도 했다. 말과 계획은 무성하지만 실천과 행동은 없다고도 비판했다. 목소리도 큰 게 장땡이었다. 노점상이 대로를 점거하고, 취한이 경찰서 기물을 부수고, 불법ㆍ폭력 시위가 시민들에게 피해를 줘도 법 집행은 찾기 어려웠다. 법 대신 눈물로 호소하고, 법 대신 인기에 편승하고, 법 대신 시민단체를 동원하는 걸 즐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런 걸 소통이고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지난 정부는 명백히 소통과 민주주의 과잉의 시대였다. 이런 점 때문에 지난 정부는 골치 아픈 문제를 애써 외면하려 했다. 쇠고기 협상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그러했고,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쌀 문제도 그렇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1994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 체결 당시 정부는 쌀 관세화를 10년간 유예했다. 대신 매년 쌀 소비량의 4%까지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했다. 쌀 경쟁력을 높이겠다면서 60조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지만 별무성과였다. 지난 정부는 이걸 반면교사로 삼아야 했다. 유예기간이 끝난 2004년에 쌀 관세화로 돌아서는 게 맞았다. 지난 10년을 허송했는데 향후 10년을 똑같이 보낼 순 없었다. 의무 도입 물량은 더 많아지게 돼 있었다. 2014년 수입해야 할 물량은 소비량의 12%나 된다. 그렇지 않아도 남아도는 쌀을 쌓아둘 창고가 모자랄 판인데 수입을 더 늘리다니.

하지만 노 정부는 관세화의 책임을 다음 정부로 미뤘다. 관세화 결정 시기를 10년 뒤인 2014년으로 연기했다. 농민단체의 거센 저항 탓이 컸다. 참여정부 정책보고서는 “관세화를 주장하는 경우 국내적으로 거센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다.

결정을 제때 못 내리고, 책임을 다음 정부에 미루는 건 비겁하고 무책임한 짓이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날아드는 돌팔매에 마빡이 깨지더라도 스스로 책임지는 게 맞다. 이 정부 역시 지난 정부와 다를 게 없다.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당장의 어려움만 모면하려는 행태는 판박이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비정규직 보호법의 적용 시점을 2~4년 뒤로 미뤘다. 노동부 장관조차 여당을 비판할 정도다. 2년 전 숱한 논의를 거친 후 해고 제한 기간이 2년으로 정해졌다. 2년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금 여당인 한나라당도, 당시 여당인 민주당도 그때의 질기고 격렬했던 논의 과정을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지금 우려되는 후유증과 부작용은 당시 숱하게 제기됐던 문제들이었다. 그렇다면 정해진 대로 7월 1일부터 굴러가게 하는 게 옳다.

물론 다시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몇 달 전 정부·여당이 내놓은 해고제한 기간을 4년으로 늘리자는 방안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2년이면 정규직으로 바뀌기 쉽지 않으니 4년으로 하자는 건 일리가 있다. 노무현 정부가 이 법을 입법할 당시 3년으로 정했던 까닭과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지금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7월부터 비정규직 대란이 일어난다. 2년이든, 3년이든, 4년이든 정부와 여당은 지금 결정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노동조합과 야당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결정을 2~4년 뒤로 미뤄선 안 된다. 4년을 유예한다는 건 다음 정권에 뜨거운 감자를 넘기겠다는 심보다.

쌀 문제도 그렇다. 수년 전부터 국제 쌀값이 많이 오르면서 국내 쌀값과의 격차가 많이 줄었다. 관세율을 300~400% 정도만 매긴다면 가격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의무도입물량 제도를 서둘러 폐지하고 관세화로 바꾸자는 정부의 주장은 옳다. 그런데도 정부는 농민단체가 거세게 저항하자 바짝 움츠러들었다. 조기 관세화를 하면 매년 2000억~3000억원의 예산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한다. 농민들로부터 분뇨를 뒤집어 쓰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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