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돕는 클린턴 ‘내조 외교’ 라이벌 내각 우려 잠재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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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 2~3일 중남미 온두라스의 산페드로술라에서 열린 미주기구(OAS) 회의에서 힐러리 클린턴(사진) 미 국무장관은 동분서주했다. 미국을 제외한 33개 회원국 모두 1962년 결정된 쿠바의 OAS 자격 정지를 조건 없이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린턴은 “쿠바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쿠바에 대한 자격 정지를 유지시킨 것이다. 미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의 중남미 전문가 테드 피컨은 “국무부의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OAS가 3일 이 사실을 발표할 때 클린턴은 현장에 없었다. 전날 밤 비행기를 타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하기로 한 이집트 카이로로 떠난 것이다. 그리고 오바마가 4일 이슬람 세계에 ‘새로운 시작’을 제안한 연설을 할 때 현장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이스라엘 정부를 위해 로비하는 라즐로 미즈라히는 “클린턴은 역대 미 국무장관 중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오바마가 미국의 최고 외교관으로 외국 정상을 만날 때 클린턴은 오바마 뒤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 문제 등에서는 클린턴보다 그가 임명한 특사들이 더 두드러지기도 한다.

이 같은 클린턴의 겸손한 행보가 돋보이고 있다고 미 일간지 유에스에이투데이가 11일 보도했다. 대통령인 오바마에게 충성하면서 보좌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내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선 때 오바마와 치열하게 경합했던 클린턴이 국무장관이 되자 일부에서 우려했던 오바마와 클린턴의 갈등은 기우에 그쳤다. 더 이상 “오바마 내각은 ‘라이벌 내각’”이란 말도 나오지 않는다. 클린턴은 유에스에이투데이와 인터뷰에서 “매주 대통령과 만나 장시간 대화한다”며 “내 역할은 정책을 개발해 실행하고 이를 담당할 사람을 뽑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바마의 정책에 맞춰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클린턴은 지난해 대선 당시 오바마가 “적성국 지도자와도 만나겠다”고 말하자 “순진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4월 의회 청문회에서 “오바마가 적성국인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 악수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오바마 대통령은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나와 다른 접근법을 내걸어 승리했다”며 오바마를 두둔했다.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에서도 클린턴에게 높은 점수를 준다. 그가 해외에서 미국의 이미지를 높이는 한편 정치력을 발휘해 국무부도 매끄럽게 운영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은 어느 누구보다 클린턴의 말을 더 듣는다”며 “그는 대통령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클린턴이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무대 뒤에서 판을 짜는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오바마가 지난 3월 아프간에 2만1000명의 미군을 증원하기로 결정한 것도 클린턴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라고 마크 커크(공화당) 하원의원은 밝혔다. 당시 바이든은 증원에 반대했으나 증원하자는 클린턴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하원 외교소위 소속인 커크 의원은 “클린턴은 내각의 수퍼스타”라며 “그가 관여하는 건 뭐든 잘 돌아간다”고 말했다.

클린턴은 최근 국무부의 외교 예산을 10% 늘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수천 명의 외교관을 더 뽑고 해외 지원을 늘리기 위해서다. 덕분에 5만7000명에 이르는 국무부 직원 사이에 인기가 높다. 국무장관으로서 성공적인 행보에 힘입어 차기 대선에 도전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정치 분석가인 찰리 쿡은 “클린턴이 국무장관을 수락했을 때는 (대통령이 아닌) 다른 길을 가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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