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디자인은 쇼가 아니다, 생활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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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교동 글씨미디어 스튜디오에서 만난 홍동원씨. 그는 “대학 때 은사 권명광(홍익대 총장)교수께서 학생들에게 ‘꼭 글을 쓸 줄 아는 디자이너가 돼라’고 당부하신 말씀이 책 쓰는 데 큰 자극이 됐다” 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친절하고 예뻐보이는 검찰 명함을 만들어 주세요.”

출판 디자인 전문 아트디렉터 홍동원(48·글씨디자인 대표)씨가 쓴 책 『날아가는 비둘기 똥구멍을 그리라굽쇼?』(동녘)는 이런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줄기차게 친절을 강조하면서 ‘수호천사’같은 명함을 요구하는 담당 검사에게 홍씨는 어떻게 했을까. 모든 시각적인 디자인 요소에서 권위적인 요소를 빼고 “부드러운 정도로 만족하자”고 설득했다. 지금의 검찰청 로고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북디자이너중 한 사람인 홍씨는 『단원풍속도첩』『이건희에세이』등 책을 포함, 포항제철의 팩트북 등 다양한 기업의 카탈로그·로고·캘린더 디자인을 해왔다. 『날아가는 비둘기…』는 그가 일하며 보고 겪은 디자인계 이야기를 코믹한 에세이로 담아냈다. 아니나다를까. 11일 기자와 만난 홍씨는 실제로 “디자인을 주제로 시트콤을 쓰고 싶은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목이 ‘날아가는 비둘기…’인데.

“날아가는 비둘기의 ‘그것’은 나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것을 그려달라는 사람은 많다. 제일 많은 것은 ‘도깨비 방망이형’으로 그려달라는 것이다(웃음).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디자인을 요구받는 상황을 말한다. 신생 기업이 로고 디자인을 의뢰하면서 ‘100년 된 기업의 이미지’를 만들어 달라고도 한다. 로고가 기업의 철학을 담아야 하지만 기업의 이미지는 로고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계 어디에서나 벤츠의 로고가 든든한 ‘등불’을 상징하는 것이 과연 로고 때문일까. “

-당신은 “자료 수집이 내 장사 밑천”이라고 했다.

“ 우리는 우물안 개구리처럼 한반도 남쪽에 몰려 살며 세상 이야기엔 먹통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국내용’ 자료로는 어림도 없을 때가 많다. 인터넷에는 ‘싼’ 정보만 넘친다. 정작 도움이 될 자료를 찾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 자료를 모으기도 한다.”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월간 ‘디자인’에 글을 연재하면서 글쓰는 재미를 느꼈다. 디자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도 바로잡고 싶었다. 특히 일하다 보면 결재 도장을 쥐고 있는 기업 임원들을 많이 만나는데 이런 분들이 디자인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이런 분들은 ‘외국과 경쟁해야 한다’며 정작 디자인을 수용하는 데는 매우 보수적이다(웃음).”

홍씨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고고학자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 우리 생활 어딘가에 묻혀 있는 ‘보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단지 발굴할 뿐이라는 것이다. 디자이너의 운명이 대중의 디자인 감각에 달려있다고도 말했다. 그는 “책을 쉽게 쓰는 데 욕심을 부리다보니 가볍고 거친 부분도 없지 않다”고 쑥스러워하면서도 “디자인이 쇼가 아니라 생활이고, 팀워크이며, 조형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얘기만큼은 꼭 전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이은주 기자 , 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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