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양광호(左) 책임연구원이 서울 서초동 민트패스 사무실에서 이 회사 신순철(右) 부사장에게 개발 중인 차세대 단말기에 관해 조언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매일 연구실에만 있다가 실제로 기술이 제품으로 이어지는 현장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가 6개월간 파견근무를 하게 된 새로운 일터는 게임단말기 개발 업체인 민트패스다. MP3 플레이어로 유명한 레인콤의 양덕준 사장이 벤처신화를 재창조한다는 일념으로 지난해 창업한 회사다. 현재 33명이 근무 중인 이 회사는 민트패드라는 개인휴대용단말기(PDA)를 생산한다.
양 박사는 이곳에서 게임단말기의 중장기 로드맵을 수립하고 차세대 단말기인 사파이어 개발을 돕고 있다. 이 회사의 신순철 부사장은 “정부 산하 연구기관에 있는 양 박사와 같은 필수 전문가에게 민간기업이 매일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특권”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의 연구개발(R&D) 현장은 속도가 승부를 좌우할 만큼 치열한 곳”이라며 “게임 엔진 분야에서 권위자인 양 박사의 조언으로 차세대 단말기 개발 기간이 단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양 박사가 합류하면서 차세대 단말기로 개발 중인 사파이어의 개념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휴대전화 크기의 단말기가 기존 PC 4대의 성능을 발휘하면서, ‘손 안의 수퍼컴’ 기능을 구현한다. 온라인 게임은 물론 3차원 가상세계까지 작동할 수 있다. 게다가 소비전력은 기존 단말기의 3분의1 수준이어서 구동시간을 크게 늘릴 수 있다. 양 박사는 “올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에는 실제 제품을 만나볼 수 있다”며 “우선은 문제은행을 저장하고 동영상 강의도 들을 수 있는 전자교과서용으로 쓰이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 박사의 경우처럼 ETRI와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등 13개 정부출연연구원은 R&D속도전을 선언하고 민간기업의 기술 개발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이들 연구원은 총 3600여 명의 박사급 연구인력과 2700여 종의 첨단 연구장비를 투입해 주로 중소기업 생산현장에서 발생하는 긴급한 애로기술 해결에 나서고 있다. 지식경제부는 10일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해 ‘R&D속도전 대국민 보고대회’를 열었다. R&D속도전에 총 3800여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인천 송도에 위치한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사이버설계지원센터의 유승목(45) 박사는 1주일의 절반 이상을 지방에서 보낸다. 금속주물과 관련해 기술적으로 문제가 발생한 중소기업을 찾아다니며 해결해주는 게 그의 일이다. 금속 제품이나 부품 제작에 문제가 생기면 컴퓨터 해석 기술을 도입해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해 준다.
그와 함께 근무하는 12명의 박사들은 중소기업 현장에서 ‘드림팀’으로 통한다. 2004년 인천 경서단지 내 광희주물제작소의 불량률을 크게 개선하면서 입소문이 퍼졌다. 이 업체가 기술지원을 받기 전 대형선박엔진에 들어가는 실린더라이너의 불량률은 14%까지 올라갔다. 무게가 최대 12t까지 나가는 것이어서 불량품을 회수해 교체해주는 데만 수천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유 박사는 2005년 컴퓨터 해석 기술을 이용해 최적의 주조방안을 마련해줬다. 불량률은 0.6%까지 낮아졌고, 연간 25억원의 비용이 절감됐다. 지난해에는 경남 창원의 대신금속이 KTX2에 들어가는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일조했다. 한 세트에 2억원 하는 부품을 동일한 품질에 가격을 3분의1로 낮추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같은 일들은 모두 생산기술연구원이 벌이는 R&D속도전과 관련이 있다.
유 박사는 “산업적으로 중요한 기술을 개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중소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알아내 신속하게 대응한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심재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