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간첩죄 아닌 ‘조선민족적대죄’ 적용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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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에서 처음으로 한국 업체가 완전 철수하는 등 남북관계가 악화하고 있는 가운데 9일 오전 판문점에서 북한 병사가 남측 동정을 살핀 뒤 건물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8일 미국 여기자들에 대해 조선민족적대죄를 적용한 배경은 뭘까.

전문가들은 여기자들이 중국에서 취재활동 중 탈북자들을 도와줬거나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을 북한이 문제 삼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장명봉 국민대(법학) 교수는 “여기자들이 탈북자들에 대해 취재한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취재과정에서 탈북자들에게 금품을 주고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북한이 반역자들로 생각하는 탈북자들을 도와준 것 자체가 북한 체제에 위해를 가하려는 목적으로 해석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탈북자들과 연계한 것이 민족적 불화를 일으킨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 형법은 조선민족적대죄를 “조선민족을 적대시할 목적으로 해외에 상주하거나 체류하는 조선사람의 인신·재산을 침해하였거나 민족적 불화를 일으킨 경우 5년 이상 10년 이하의 노동교화형에 처한다”(69조)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법정 최고형에 해당하는 12년이란 중형을 선고하기엔 무리라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여기자들을 기소하는 데는 오히려 간첩죄가 더 가깝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나온다. 법 조문상으론 취재를 빙자해 탈북자 정보 등을 정탐했다는 혐의를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찍은 사진이나 영상이 결정적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형량도 조선민족적대죄와 같다.

그래서 북한이 사건 초기부터 여기자들을 카드화하려는 계산을 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달 25일 핵실험 직후 가족들과 통화하게 하고, 평양 주재 스웨덴 대사의 면담을 허용한 점이나 대북 경제제재 논의가 급물살을 타는 시점에서 선고를 내린 점 등이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홍익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이번 선고는 대북 적대시 정책을 바꾸라는 미국 행정부에 보내는 메시지일 가능성이 있다”며 “간첩죄를 적용할 경우 향후 석방 과정에서도 대내외에 설명하기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자들 어떻게 되나=그동안 북한에 억류됐던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호텔이나 초대소에 머물다 풀려났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공산당원인 알리 라메다는 66년 북한에서 스페인어 통역으로 일하다가 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기소돼 20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6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그때문에 이번 미국인 여기자들도 극적 반전이 없을 경우 일단 복역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나온다. 게다가 최근 북·미관계가 좋지 않아 “본때를 보여주자”는 북한 지도부의 심리가 작용할 수 있다. 선고 전 석방 협상이 이뤄지지 않은 점도 복역 가능성을 높여 주는 대목이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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