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난장]아라리 난장 9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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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남의 장짐을 빼돌려 흥정을 벌이자 했던 그들이었지만, 정작 마주치고보니 사악한 성품은 아니었다. 알고보니 그들은 원주나 제천의 변두리 마을에 살면서 강원도 외장을 돌아 겨우 연명하고 있는 딱한 처지들이었다. 텃세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연명할 방도를 빌리자는 것이었다.

장짐을 찾게 된 것을 알아챈 일행이 가게 밖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장짐은 고스란히 되찾게 되었지만, 따져보면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봉환은 진부장 출입이 여의치 못하게 되었고, 태호도 당분간은 영월장 출입을 삼가야할 처지였다. 게다가 평창장까지 포기해야할 입장이라면, 겨우 터놓은 상로 (商路)에 궤도수정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속사정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일행은 게워낸 장짐을 넘겨 받느라 신바람이 나 있었다. 결국은 예정에 없었던 하룻밤은 평창에서 묵고 이튿날에 길을 달려 주문진에 당도하였다. 도착한 그날 밤에 윤씨에게 통기하여 다섯 사람의 동업자들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그동안의 장삿길에서 얻은 잇속을 따져볼 때가 된 것이었다.

장부책에 기재된 물목 (物目)에 따라 손익을 따져가며 전자계산기를 두드리는 일이 밤 늦도록 계속되었다. 구입비와 유류대를 공제하고 이문으로 계산할 수 있는 액수가 얼추 백만원에 육박하였다. 그러나 그 현금이 모두 손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부령 황태덕장의 출하를 기다려 선금으로 질러둔 돈이 가장 큰 몫이었고, 팔다 남은 코다리명태와 잡곡은 현물을 금액으로 따졌다. 그러나 얽히고설킨 거래 내막을 일목요연하게 노출시킨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직은 본전과 이문을 따질 때가 이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본전을 축내지 않았다는 확인으로 만족하자는 철규의 말에, 실망의 빛은 완연하였으나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서야 철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외장을 정신없이 누비면서 경비를 분별없이 지출한 흔적이 있네요. 물론 나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장사의 달인 (達人) 이 되자면, 앞으로 십원짜리 동전 하나라도 헤프게 알아선 안되겠지요. 좀스럽고 쩨쩨하다는 평판을 들을까 해서 절약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생각이 오래가면, 돌아오는 것은 속빈 강정이고 허풍쟁이란 소문일 뿐입니다.

절약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특히 장사꾼인 우리들에게는 정직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성품이 투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큰 자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이 흙탕물이 될수록 그런 사람을 신용하지 않습니까. 이익이 보잘것이 없다 해서 실망할 건 없다고 봅니다. 잇속을 보았다 해도 신용을 잃었다면, 우린 헛장사를 했다고 봐야겠지요. "

"오랜만에 달걀 노른자위 같은 한 말씀 듣는구만. 그런 말씀은 문교부장관한테 건의해서 애들 교과서에도 실어야 해. 주머닛돈 쌈짓돈 할 것 없이 허랑방탕하는 인사 치고 쪽박 차지 않는 놈이 어디 있나. 주문진 선착장에도 그런 놈이 한 둘인가. " "우리 행수님 말씀을 새겨듣자면, 곱다시 형님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형님이 맞장구치고 나서니까 내가 말문이 막힙니더. " "앞으로 우리 좌판으로 찾아오는 장꾼을 보기만 하면, 물건을 사든 안 사든 무조건 상대방이 내 뒤통수를 볼 수 있도록 고개를 숙이고 인사 올리는 겁니다.

그러자면 내 이마가 상대방의 종아리까지 내려가야 되겠지요.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상대방을 깔보거나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시골 장꾼들은 아직 그런 대접은 받아본 경험이 적기 때문에 자칫하면, 사람 비웃는다고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절이라고 생각하게 하려면 상대방의 눈에서 내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하겠지요. 머리를 숙이고 큰 소리로 인사를 드리면, 우리 기분도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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