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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오림포스 호텔서 태어나 워커힐 거쳐 2년 만에 해외 수출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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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호 20면

1965년 초 인천 풍치지구에 현대식 호텔을 짓고 있던 유화열씨는 사업 파트너였던 젊은 사업가에게 손을 내민다. 자신이 건축 중이던 오림포스 호텔 경영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젊은 사업가가 당시 38세의 고(故) 전락원 파라다이스 그룹 회장이었다. 서울시관광협회 이사를 지내면서 관광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전 회장으로선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카지노 성장사 한국

민간 자본에 의해 탄생한 최초의 대형 호텔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오림포스는 경영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인천이라는 지역적 한계도 있었지만 아직 호텔을 이용하는 문화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66년 이 호텔을 방문하면서 오림포스는 반전의 기회를 맞는다. 호텔의 경영 사정을 보고받은 박 전 대통령은 관련 부서에 “협조해 줄 것”을 지시했다.

고 전락원 회장

이때 유 회장과 전 회장이 엄민영 내무부 장관에게 내놓은 회심의 카드가 ‘카지노 사업장’이었다. 10여 년 전부터 미군을 대상으로 운수 사업을 하면서 카지노 사업에 흥미를 갖고 있던 전 회장은 “호텔의 경영 정상화는 물론 외화 획득이라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며 정부를 설득했다. 상이군경회장을 맡고 있던 유 회장은 “수익금으로 한국전쟁 유가족 등을 돕는다”는 ‘명분’도 내세웠다.

이듬해 8월 오림포스는 필리핀 출신 딜러 10여 명을 스카우트해 카지노를 개설했다. 한국 1호 카지노가 서울이 아닌 인천에 개설된 사연이다(2000년 파라다이스는 이 호텔을 인수해 파라다이스 인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전 회장은 당시 한국관광공사가 소유하고 있던 서울 광장동 워커힐 호텔에 카지노를 개설했다. 마땅히 외국인이 즐길 만한 오락시설이 없었던 상황에서 워커힐 카지노는 금세 서울의 명소가 됐다.

‘글로벌 카지노맨’으로 전 회장의 행보가 돋보인 것은 이때부터다. 한국의 카지노 사업이 안정되자 전 회장은 곧바로 카지노 수출에 발 벗고 나섰다. 그는 60년대 말부터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근교에 새로 지은 겐팅하이랜드 호텔 카지노, 미국 마이애미 선상 카지노 경영에 뛰어들었다. 73년에는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사파리파크 호텔 카지노에 진출했다. 이를 계기로 전 회장이 쌓아 온 ‘아프리카 네트워크’가 나중에 88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전 회장은 올림픽 유치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았다. 현재 파라다이스는 전 회장의 장남인 전필립 회장이 이끌면서 관광·레저 전문기업으로 연 8000억원대 매출을 올리고 있다.

전 회장의 특별한 ‘카지노 사랑’을 보여 주는 일화 한 대목. 2004년 11월 전락원 파라다이스 그룹 회장 장례식 때 일이다. 이때 고인의 운구를 맡은 사람이 모두 파라다이스 카지노사업부 팀장급 간부 8명이었다. 이 회사에서 28년간 근무한 한동창 상무는 “호텔·면세점·건설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쳤지만 회장님은 카지노맨들과 마지막을 함께하셨다”며 “이것만 봐도 고인의 카지노에 대한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 회장은 메세나 활동에서도 선구적인 기업인이었다.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70년 ‘동서문학’을 통해 문인들에게 순수문학의 장(場)을 제공했다. 친누나였던 수필가 전숙희씨와의 인연이 있기도 했지만 당시로선 기업인이 교육문화 사업에 투자한 사례를 찾기 힘들 때였다. 전 회장은 또 예술 인재 발굴에 관심을 가져 계원예술고(79년), 계원조형예술대(93년)를 설립하기도 했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국내 카지노 업계는 파라다이스가 독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 들어 규제 완화 정책을 펴면서 양상이 달라진다. 제주도에서만 5개의 카지노가 한꺼번에 면허를 따 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인이 몰려드는 제주도에 카지노를 열면 무조건 떼돈을 벌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결과는 반대였다. 새로운 수요가 생기지 않는 상황에서 공급이 넘치다 보니 영업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2006년 서울·부산 등에 세븐럭 카지노가 문을 열면서 제주지역 카지노 업계는 고사(枯死) 직전까지 몰렸다.

현재 제주도에서 영업 중인 8개 카지노 가운데 그나마 현상 유지를 하는 곳은 서너 군데에 불과하다. ‘음지’에 있던 카지노의 지위가 격상된 것도 이즈음이다. 정부는 94년 8월 관광진흥법을 개정하면서 사행행위 영업으로 구분하던 카지노 산업을 ‘광의의 관광산업’에 포함시켰다. 이전까지 카지노는 ‘복표 발행 및 현상 기타 사행행위 단속법’으로 규제되면서 ‘도박 행위’라는 원죄에 묶여 있었다. 카지노산업협회 권영기 사무국장은 “경찰청 규제를 받던 카지노 산업이 비로소 법적으로 양지로 나온 시기”라며 “카지노 산업이 외화 유치에 지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현실이 공인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영삼(YS) 정부 들어오면서 카지노 업계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투전기를 걷어치워라”는 YS의 한마디가 세무조사 광풍으로 이어진 것이다. ‘슬롯머신 업계의 대부’ 정덕진씨도 소용돌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90년대 초까지 전국 슬롯머신의 절반가량을 장악했던 이 풍운아는 그러나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전 의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됐다. 현재 그의 동생인 정덕일씨가 제주도 신라호텔에서 벨루가 카지노를 경영하고 있다.

2000년대는 카지노 업계에 또 한번 새 바람이 불어닥친 시기다. 당시에도 로비 열풍은 여전히 뜨거웠다. 현대그룹이 금강산 입구에 정박해 놓은 유람선에 선상 카지노 개설을 추진하다가 결국 좌절했고, 국내 유수 호텔의 오너가 서울 강남에 카지노를 유치하겠다고 나섰으나 역시 성사시키지 못했다.

2006년부터는 카지노 시장 판도도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해 관광공사 자회사인 그랜드코리아레저가 ‘세븐럭’이라는 브랜드로 서울역 앞 밀레니엄힐튼과 삼성동 코엑스, 부산 롯데호텔 등 도심 요지에서 영업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이와 더불어 2000년 폐광 지역인 강원도 정선에는 내국인 대상 카지노인 강원랜드가 문을 열었다.

세븐럭의 등장으로 외국인 전용 카지노 시장에서 ‘40년 맹주’ 파라다이스는 강력한 라이벌을 만났다. 지난해 서울지역 카지노 시장 점유율은 파라다이스 워커힐이 41.2%, 세븐럭 코엑스점이 34.1%, 세븐럭 힐튼점이 24.7%를 차지했다. 추호석 파라다이스 사장은 “경쟁을 통해 건강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게 됐으니 고무적인 일”이라며 “오랜 세월 축적한 카지노 운영 노하우와 특화된 VIP 마케팅을 통해 월드 베스트 카지노(WBC)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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