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 신비]실체 연구 급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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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신비의 세계였던 '기억' 이 차츰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과학자들은 기억도 본질적으로 뇌속 물질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들을 속속 제시하고 있다. 깜박깜박하는 건망증, 또 지워지지 않는 악몽같은 기억의 실체도 머지않아 규명될 것으로 보인다.

흔히 기억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로 '새×××' 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해오라기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이 새는 동물원의 구경꾼들이 연못에 먹이를 던져주는 장면을 유심히 '관찰.기억' 한다. 그러고 나선 땅에 떨어진 동료의 깃털을 물어다가 연못에 던져준다. 이를 먹이로 알고 물고기가 몰리면 잽싸게 부리를 놀려 물고기를 낚아챈다. '하찮은' 지렁이마저도 때론 놀라운 기억력을 보인다.

지렁이는 부드러운 흙과 까칠까칠한 모래가 Y자처럼 갈린 통로 앞에 서면 부드러운 흙쪽으로 방향을 튼다. 단 이전에 이런 경험과 기억이 있는 지렁이에 한해서다. 물론 지렁이나 새가 제아무리 머리가 좋다해도 사람의 기억력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기억은 사실 최근까지만해도 미지의 세계였다. 머리라는 블랙박스는 학자들의 접근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들어 기억에 관해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들이 나오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에릭 캔델교수팀은 '기억의 본질은 추상이 아니라 물질이다' 는 증거를 내놓았다. 과거 이 대학 연구팀에서 일한 서울대 강봉균교수는 "기억이 일어날때 신경세포에 물리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고 말했다.

전화번호 기억시 일어나는 뇌세포의 변화가 그런 예. 동사무소나 극장등 한 번 듣고 잊어버리는 전화번호의 경우 기억이 저장될때 신경세포의 막에 달라붙은 단백질이 살짝 변형되는 등의 '가벼운'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자기집 전화번호라면 사정은 영 다르다. 이 경우는 기억에 대한 신호가 세포의 핵 (核)에 까지 영향을 미쳐 아예 새롭게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등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는 기억, 악몽같은 기억이라면 이미 이처럼 뇌세포속에 '박혀버린' 기억일 가능성이 크다. 기억도 다같은 기억이 아니라는 사실이 물질적으로 밝혀진 것이다. 외부의 자극이 반복되면 기억력이 강화된다는 사실은 이제 물질적으로도 확인된 셈이다.

고려대 심리학과 남기춘교수는 "이같은 사실은 사람마다 기억능력 자체에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계속된 학습을 통해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 말했다. 기억이 물질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다른 생물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예방주사로 만들어지는 항체도 나름대로 기억을 갖고 있다.

병원균이 침입하면 이를 기억해뒀다 달라붙어 싸우는 것도 그 한 예.

기억에 관한 학자들의 또다른 관심은 사고 (思考)에 미치는 영향. 지능연구자들은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IQ가 높을 가능성이 크다" 고 말한다.

한국교원대 생물교육과 박시룡교수는 "동물들에서도 판단과 유사한 행동이 있는데 이 경우 기억력 차이가 판단력 차이를 가져오는 것 같다" 고 말했다. 강가에 새끼를 낳은 꼬마물떼새의 경우 여우나 오소리 등 해를 끼칠만한 동물이 오면 용케도 이를 기억, 부상당한 흉내를 내며 새끼들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유인한 후 날아간다는 것. 반면 소나 양이 걸어오면 이들이 새끼를 밟아죽일 것으로 '판단' , 두 날개를 퍼득이며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

기억이 물질적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스트레스가 기억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캐나다 맥길대학팀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 최근호를 통해 스트레스때 분비되는 코티졸이라는 호르몬이 기억중추인 뇌의 해마부위를 위축시켜 기억력을 감퇴시킨다는 보고를 내놨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기억도 물질들의 상호작용에 절대적으로 영향받는다는 사실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진리처럼 보인다. 미국 등의 일부 제약회사들은 이 점에 착안, 장차 기억관련 물질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약까지도 대대적으로 개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황세희·김창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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