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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덕우 전총리 강연 요지]"개혁 하라면서 제도적 뒷받침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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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나라 금융시스템은 크게 세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금융의 자율성이 없다는 점이다. 정부 간섭이 너무 많은 관치금융 체제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책임경영체제가 갖춰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은행도 주식회사다. 주주총회나 이사회 중심의 경영이 이뤄져야 한다.

셋째, 금융감독 기능이 너무 소홀했다. 정부가 감독을 제대로 했다면 오늘의 금융파탄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금융파탄의 직접적인 원인은 국제화.세계화의 물결이다. 그러나 국제화.세계화를 떠들기에 앞서 구조조정을 미리 했어야 했다. 앞으로의 금융개혁은 앞서 지적한 세가지 문제점을 기초로 추진돼야 한다.

현 정부는 개혁의 목적과 방법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을 빚고 있다. 금융파탄을 가속화한 기아사태만 봐도 그렇다.

기아사태는 채권은행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우왕좌왕하지 말고 원칙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형식만이라도 산업은행이 전권을 갖고 처리하도록 하고, 정부는 뒤에서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모든 것을 정부가 다 하겠다고 하다 보면 관치금융은 끝이 없다. 정부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그에 합당한 절차와 방법을 택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경제개혁과 관련해 IMF가 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은지를 따져보자. 개인적으로는 IMF처방에 회의적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미국에서도 논란이 많다.

현재의 금리는 터무니없이 높다. 아무리 외환시장 안정이 최고 관심사라 해도 시중 콜금리가 40%를 웃돌고 은행 환매채 금리가 25~26%인 상황에서는 멀쩡한 기업도 다 쓰러진다. 이런 사태가 오래 지속되면 큰일 난다.

기업이 쓰러지는 이유는 자금이 안돌아서다. 은행들이 국제결제은행 (BIS) 기준을 맞추기 위해 대출을 기피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산업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는 점이다.

IMF 논리는 고금리를 유지해야 한계기업을 도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대출을 줄이면 부실기업이 사라지고, 부실대출이 줄면 금리가 내려가 결국 경제는 정상화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BIS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BIS 8%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지난 87년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서 정한 정치적 기준이다. 일본 금융기관들은 BIS 자기자본 비율이 평균 4%다.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다. 모든 것을 미국식으로 강요해서는 안된다.

위기상황에서는 금리를 아무리 높여봤자 외자유치가 안된다. IMF에서는 고금리가 임시조치라고 하지만 과연 그 기간이 3개월이 될지, 1년이 될지 분명하지가 않다. 따라서 정부는 거시경제정책 운영에 있어 균형을 유지하도록 IMF를 설득해야 한다.

재벌개혁은 금융개혁과 표리 (表裏) 관계에 있다. 그러나 재벌.금융개혁은 시간이 걸린다. 문제는 개혁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정부는 기업에 왜 개혁을 하지 않느냐고 자꾸 다그치는데 이는 무리한 얘기다. 재벌 구조조정은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확실히 이뤄지게 해야 한다.

자고 나면 '개혁' 소리 뿐인데, 정작 기업들은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갈피를 못잡고 있다.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니 사업계획도 못세운다.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하자면 정부가 꼭 해야 할 우선적 개혁과제를 확정해야 한다.

현재 정부내에 개혁추진의 중심체가 없다는 것도 커다란 문제다. 재계는 누구한테 가서 얘기를 해야 할 지 모른다. 과거에는 재경원이라는 중심체가 있었으나 지금은 청와대인지, 기획예산위원회인지, 재경부인지 혼란스럽다.

모든 문제를 분석정리해 대통령에게 판단할 수 있게 자료를 제시해주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 청와대 경제수석실의 몇사람만으로는 안된다.

모든 문제를 대통령이 직접 결정한다는 것은 무리다. 대통령이 신이 아닌 한 속단하거나 독단할 수도 있다.

유권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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