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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도는 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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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해찬 총리가 국정현안조정회의에서 약대 6년제에 대해 인력양성 체계를 어떻게 할지 좀더 면밀히 검토해보라고 지시했다는 보도가 실린 날, 나는 눈을 의심했다. 교육부장관 시절,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같던 교원정년 단축을 밀어붙인 그의 뚝심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익집단의 엄청난 반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가 이젠 달라진 건가?

대한약사회와 대한한의사협회가 한약학과를 졸업한 사람에게만 한약사 면허를 부여키로 연말까지 약사법을 개정한다는 조건을 달고 가까스레 약대 6년제에 합의한 지 겨우 17일. 합의서에 서명한 잉크가 미처 마르기도 전에 '없던 일' 신세로 되돌아왔다. 합의문 발표 후 대한의사협회가 파업불사를 외치며 전면 반대에 나서고, 각 의과대.한의대 학생들의 수업거부가 이어지고 있기는 해도 그라면 우물쭈물하는 교육부를 재촉해 약대 6년제 시행을 매듭지으리라는 나의 예상은 형편없이 빗나갔다. 더구나 약대 6년제는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긍정적 검토'를 약속한 데다 국민의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약사제도발전특별위원회도 이를 의결하지 않았던가. '더 배우겠다는 데 웬 시비냐'는 약학계와 '약사가 의사 노릇을 하겠다는 음모'라는 한의를 포함한 의학계의 길고도 지루한 싸움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한숨부터 나왔다.

서울대 약대교수회의가 기초의학 강의와 현장실습 등으로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수업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는 안 등을 심의한 때가 1973년 8월. 그간 새로운 약과 질병은 셀 수 없이 늘어났는 데도 정작 31년간 변한 것은 개편불가의 이유뿐임을 묵은 신문들은 전하고 있다.

70~80년대에는 '취지는 좋지만 학생들의 학비 부담문제'가 주를 이루다가 90년대 초에는 '교수와 각종 장비의 충원문제' '우수한 학생들의 약대 기피' '대학원 진학률이 떨어져 약학연구가 퇴보할 것'에 대한 우려로 바뀌었다. 근래는 '한.약 통합약사를 하려는 것' '예비약사가 임상을 배워 약국에서 환자들을 진찰할 것'이 주된 이유다.

약학을 전공하는 교육소비자들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림돌이던 것이 어느 사이엔가 다른 집단 간의 이해를 둘러싼 문제로 변모했음을 기록들은 보여주고 있다. 더욱 나쁜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집단 간의 갈등이 더욱 날카로워져 대학생들의 수업파행과 종사자들의 파업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미적거림이 이해집단 간의 갈등의 골만 깊게 팠다는 증거다.

약대 6년제에 대해 "인력양성 체계를 어떻게 할지 좀더 면밀히 검토해 보라"는 이 총리의 지시가 결코 해묵은 난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이런 까닭이다. 갓난아이가 어엿한 가장이 되고도 남을 시간만큼 검토한 학제가 아닌가. 이제는 정부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약속하고 결정을 내려야한다. 어렵사리 이룩한 한의사협회의 이번 합의에 한의과 대학생들이 반발해 철회를 요구하며 수업거부로 맞서고 있는 오늘의 사태는 갈수록 어떤 논의도 모든 이들이 만족하는 합의점을 찾아내기 어려움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어떤 결정을 도출해 내는 데 있어서 '과정의 민주주의'는 소중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지나치면 아니하는 것만 못하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세월은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정부가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는다고 해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세계가 몽땅 30여년 전으로 돌아가 주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멈칫거리는 동안 국민의 건강만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원칙주의자 이해찬 총리가 정녕 모르는 것일까?

홍은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