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에 대한 고고학적 논의]유적 발굴안돼 실체규명 어려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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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고조선에 대한 고고학적 논의는 60년대에 북한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논의의 요점은 비파형 동검 (銅劍) 과 미송리형 토기의 발굴지역에 근거해 고조선의 강역 (疆域) 을 대동강 북쪽부터 요하 (遼河) 유역까지 넓힌 것. 해방 전 일본학자들의 압록강 이남설을 반박하는 주장이다.

고조선 유물이 전혀 없는 제약속에서 남한에서는 80년대 들어 비로소 위의 유물과 고조선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진행됐다.그러나 비파형 동검 출토지는 요하 서쪽에서 한반도 남해안까지 넓게 걸쳐 있는 반면 미송리형 토기는 요하 동쪽에서 청천강 이북까지만 국한돼 있어 요하 서쪽을 고조선 강역에서 제외하려는 연구시각이 강하다.

소수이지만 요동반도 서쪽 대릉하 (大凌河) 까지 고조선의 영역을 확대하려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고조선의 영역 문제에 대해 견해 차이가 생기는 것은 현단계에서 고조선의 존재를 말해주는 표지 (標識) 유물의 수가 한정돼 있고 그 출토지가 분명치 않다는데 있다.

고대사회의 존립 근거를 밝히기 위해 필수적인 궁정.사원.왕릉.도로 등의 유구.유적은 아직 고조선 영역 내에서 발굴된 예가 없다.중심 도읍지를 입증할 만한 발굴자료가 없기 때문에 고조선을 국가의 실체로 인정할 수 없고 다만 일부 유물이 나오는 지역을 광의의 문화권정도로 묶는 견해도 있다.

고조선의 사회성격에 대한 논의도 견해차이가 크다.북한에서는 70년대부터 논의가 시작돼 고조선을 고대 노예제국가로 주장하고 있다.

그 예로서 요녕반도의 여대시 (旅大市) 강상 (岡上) 무덤이 비파형 동검을 부장한 순장 (殉葬) 무덤인 것을 들고 있다.이 역시 고대정치집단의 존재를 증명해줄 도읍과 취락 유적 발굴이 뒷받침되지 않아 무리한 주장이란 지적이다.

이제까지 고조선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에서 가장 큰 혼란을 가져온 것은 북한이 발표한 단군릉 발견이다.북한에서는 평양 근처에서 단군 (檀君) 유골이 남아있는 단군릉을 발견했다며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학설을 갑작스럽게 바꿨다.

비파형 동검의 제작시기도 종전보다 1천년정도 앞당겨 단군시대부터라고 주장해 혼란을 가중시켰다.근거 자료 없이 제시된 이러한 주장은 결국 북한 고고학의 시대구분 틀이 최근에 와서 크게 흔들린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렇지만 내부의 연구 배경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많아 남북한 고고학자들간의 정보교환이 소망스럽다.

이청규<영남대교수.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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