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진 “한국-몽골 국가연합? 아직은 소설 같은 얘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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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호 11면

몽골의 ‘바흐’는 한국 씨름과 비슷하다. 지난해 7월 의정부에서 열린 몽골 전통 축제 ‘나담’ 때 바흐를 즐기는 몽골인들. 중앙포토

25년 전 출판된 소설 『단』은 휘황찬란한 한국의 미래를 담아 주목받았다. 우리나라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일을 이룬 후 대륙으로 진출한다는 얘기였다. 독자들은 주문에 걸린 듯 열광했다. 고구려와 발해 멸망 이후 우리 역사 무대에 심심찮게 등장한 북진정책과 북벌론의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이라는 풀이가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이자 상상·예언의 뒤죽박죽일 뿐이었다.

황석영 ‘알타이 연합론’ 논란

최근 소설가 황석영씨가 『단』의 스케일과 닮은 ‘몽골+2코리아’ ‘알타이연합’론을 제기해 논란이 일고 있다. 그가 지난 10~14일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2개국(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방문길에 동행하면서 거창하게 내세운 ‘변절’의 명분이 바로 이 연합론이었다. 그는 블로그에서 “현재의 세계적 공황과 한반도가 부딪친 정치·경제적 한계를 극복하고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서도 국가 경영에 대한 비약적인 상상력과 기획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황씨의 연합론이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대통령의 의중이 담겨 있는 것처럼 비치기 때문이다. 그는 “작년 가을부터 대통령과 몇 차례 뜻을 나누면서 ‘한번 해봅시다’ 하게 됐다”고 말했다. 소설가의 단순한 꿈이나 상상의 일단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다.

1990년 수교 직후 학자들 농담서 시작
한·몽 연합론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1990년 3월 수교 직후 출범한 한국몽골학회 회원들이 학술 교류를 하다 자연스럽게 나온 담론이었다고 여러 학자들은 회고했다. 초대 한국몽골학회장인 최기호 상명대 교수는 “수교 직후부터 한국은 인구가 많고 땅은 좁은데 몽골은 정반대이니 ‘서로 바꿔 사는 게 어떠냐’는 농담을 주고받았다”며 “지구상에서 인종·문화·언어가 가장 가깝고, 외세의 위협과 침략에 시달린 역사도 비슷하니 형제끼리 낮은 단계의 동맹을 맺자는 말이 나오곤 했다”고 말했다.

2007년 3월 ‘한국-몽골 국가연합의 의의’ 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 모습. 국가연합론이 처음 공식 논의된 자리였다. 중앙포토

마침 중국이 동북공정과 북방공정을 밀어붙이자 공동 대응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중국의 역사 왜곡을 두 나라 공통의 위협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의 역사가 중국사에 편입되는 것에, 몽골은 몽골제국과 칭기즈칸이 중국과 중국인으로 둔갑되는 데 분개했다. 단순 역사 왜곡으로만 보지 않고 영토 위협 수준으로 인식하는 것도 양국이 비슷했다.

첫 공론화는 2007년 3월 서울 서초구 외교센터에서 ‘한국-몽골 국가연합의 의의’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였다. 이 세미나에는 구양근 성신여대 총장이 기조연설을 하고, 이상면 서울대(국제법) 교수, 바트술해 몽골 뭉크하누대 학장, 박원길 고려대(역사학) 교수 등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국제법까지 심도 있게 짚어 본 자리였다.

이 대통령도 이들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황씨에게 “(연합론의) 지적 소유권은 나에게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현대그룹에서 고 정주영 회장과 함께 넘나들던 북방지역에 남다른 관심을 표시해 왔다. 그는 서울 시장으로 재임하던 2005년 9월 서울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시를 방문했다. 다음 해 5월에는 몽골 측에서 서울시를 방문한 교류단과 접촉했다. 이 무렵 그는 월간 신동아(2006년 6월호)에 “(국가연합은) 중국의 반대가 없다면 서로 이익이 되기 때문에 실현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 주변에도 몽골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믿는 인사가 눈에 띈다. 이들은 올 2월 2일 출범한 ‘코리아몽골포럼’에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포럼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인명진 목사다. 그는 MB정권 창출을 도왔고,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냈다. 필요하다면 MB와 직접 통화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인 목사는 “국가연합을 얘기할 단계는 아니지만 몽골 인구의 1.5%가 사는 한국에서 몽골인에게 조선족에 준하는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포럼의 구해우 상임이사는 인수위원회 인수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한·몽 국가연합론을 북한을 포함시킨 ‘몽골+2코리아’로 발전시켰다. 남북한 양자 간 연방국가나 국가연합이 아니라 몽골까지 포함하는 3자 연합론이자 통일론이다. 냉전시대에 북한과 가깝게 지낸 몽골이 남한과 북한을 중재할 수 있고, 통일 후에도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지식인 중심의 담론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권 등의 인사를 포함시켜 실천 방안을 도출해 보자는 취지에서 코리아몽골포럼을 만들었다”며 “두 나라 사이를 자유무역협정(FTA)과 비자면제협정으로 교류와 협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300년 전의 ‘조선·몽골 연합론’
연합론의 뿌리는 18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712년 11월 조선의 사절단(冬至兼謝恩使)은 베이징을 향했다. 사절단 일원 최덕중은 『연행록(燕行錄)』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다음 해 3월 30일까지 5개월간의 여행기다. 그의 결론은 놀랍게도 조선과 몽골이 힘을 합쳐 선양 이북 지역을 차지하고, 궁극적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자는 것이었다. 병자호란(1636년)의 수모를 갚기 위해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그때까지 그다지 불경스럽지 않았다는 증거다. 비록 군사 동맹 수준의 아이디어이긴 해도 최덕중은 고려 말 원(元) 축출 이후 처음으로 한·몽 연합론을 제기한 인물로 평가된다.

조선 세종 때는 몽골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형제국이니 힘을 합쳐 명나라를 공격하자’는 국서를 전달했다. 일제하에서도 몽골과 연합하는 방안이 논의됐고 실제 몽골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일제가 내몽골자치국을 세워 지배하자 몽골인들은 소련과 연대해 일본에 대항했다. 국민대 장석흥 교수는 연구 논문에서 “1920년대 중반엔 몽골에 조선공화국을 세우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밝혔다.

“국내 몽골인 인권부터 챙겨야”
연합론에는 시기상조라는 반응이 많다. 인 목사는 “(황씨가)소설을 썼다”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몽골 측에서 들으면 오해받을 만한 내용이고 먼 훗날이라면 모르겠지만 공식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며 “한국에서 일하는 몽골인의 인권을 보호하고 귀국한 몽골인을 위해 한국문화원 같은 것을 만드는 게 더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교류 과정에서 일부 한국인이 몽골인에게 나쁜 짓을 많이 해 반한 감정이 커지고 있는 시기에 몽골인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연합론을 띄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진보진영에서는 “‘혈연 공동체’ 운운하는 발상 자체가 파시즘의 징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제국주의 파시즘적 사유의 뒤늦은 한국적 재현이자 아류”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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