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59> 예수의 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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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지금껏 붓다와 공자, 소크라테스의 유언을 살펴봤죠. 이제 4대 성인(聖人) 중 마지막인 예수의 유언을 살펴볼까요? 거기에도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어떤 비밀이냐고요? 바로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예수의 마지막 한 마디에는 그 열쇠가 담겨져 있습니다.

#풍경1 : 붓다는 80세, 공자는 72세에 비교적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았죠. 반면 소크라테스와 예수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한쪽은 독배를 들었고, 또 한쪽은 십자가 처형을 당했죠. 성인을 몰라보는 인간의 시선이 참 모질었던 거죠.

2000년 전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메고 공동묘지로 끌려갔죠. 골고다 언덕입니다. 오전에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혔죠. 살을 찢는 고통과 목마름, 사람들 조롱 속에서 예수는 죽어갔죠. 구경꾼들은 “어디, 하나님(하느님)이 와서 그를 구해주나 봅시다”라며 그를 놀렸습니다.

그렇게 6시간이 흘렀죠. 작열하는 태양과 육신의 고통 속에서 예수의 생명은 꺼져갔죠. 그러다 죽음 직전에 그는 외쳤습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누가복음 23장46절) “이제 다 이루어졌다.”(요한복음 19장30절) 이 말을 끝으로 예수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바로 예수의 유언입니다.

#풍경2 : 서울 화곡동에 있는 ‘떼제 공동체’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테제에 본부가 있는 초교파 수도공동체인 이곳은 금요일 저녁마다 예배를 봅니다. 기도를 하며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노래 가사가 귀에 ‘팍!’ 꽂혔거든요. “아버지~당신 손에 내 영혼 맡기나이~다.” 다름 아닌 예수의 유언이었죠. 그 유언을 노랫말로 만든 ‘떼제 노래’였습니다.

가사는 무척 단출했죠. “아버지, 당신 손에 내 영혼 맡기나이다.” 돌림노래처럼 그 구절만 계속 되풀이됐죠. 울림은 대단했습니다. ‘예수의 유언’은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제 안에서 돌아갔습니다. 그 톱니바퀴에 나의 영혼, 가짐의 영혼, 집착의 영혼이 부서져 내리더군요. 그제야 알겠더군요.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는 예수의 유언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말인지 말입니다.

사람들은 말하죠. “뭐, 평이한 유언이군.” “결국 교회에 다니라는 말이군.” “저런 말은 나도 하겠네.”

과연 그럴까요. 잠시 눈을 감아보세요. 그리고 저마다 삶을 향해 질문을 던져보세요. ‘나는 지금껏 누구의 영혼으로 살았던가?’ 열이면 열, 이런 답이 나오겠죠. “나는 매순간 나의 영혼으로 살아왔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빠짐없이 나의 영혼으로 살아왔고, 살고 있고, 또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대답은 달랐죠. ‘십자가 죽음’을 체험한 뒤 그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갈라디아서 2장20절)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내 영혼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혼이 산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유언을 너무 쉽게 해석하죠. 세례를 받고, 교회에 다니고, 성경을 읽으면 저절로 나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긴 걸로 여기죠. 그러고는 “이미 다 맡겼다, 더 이상 맡길 게 없다”고 반박하죠. 과연 그럴까요. 예수의 맡김, 바울의 맡김은 그런 ‘얼렁뚱땅 맡김’이 아니었습니다. 왜냐고요? 그들의 맡김은 십자가를 통과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온전한 죽음입니다. 그 위에서 나의 죄, 나의 영혼이 죽는 겁니다. 그것도 ‘남김없이’ 죽는 겁니다. 온전히 죽을 때 온전한 맡김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유언은 “아버지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죠. 그러나 그 유언 전에 괄호 속 한 마디가 더 있는 거죠. 다름 아닌 ‘나의 영혼’에 대한 사망선고입니다. ‘사망’이라고 하니까 겁이 나세요? 두려우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부활을 위한 사망, 자유를 위한 사망, 행복을 위한 사망이니까요. 그게 바로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겠죠. 천국의 열쇠 말입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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