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외교의 천재인가 ① 총을 든 先軍외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북한이 2006년 10월에 이어 두 번째 핵실험을 했다. 이번 핵실험은 1차 핵실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강도가 강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분석된다. 김정일은 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것일까. 한반도를 새로운 대결과 분쟁의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는 김정일의 무력 액션을,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장성민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를 통해 3회에 걸쳐 집중 분석해 본다.

김정일 정권 최대의 외교적 목표는 체제안보다. 그러면 김정일 외교술의 핵심은 무엇일까.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20년 넘게 펼쳐온 핵 외교를 지켜보면서 북한의 외교술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김정일에게는 외교가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김정일의 외교 행보가 대부분 군사적 시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제 유지에 급급한 김정일에게 외교적 행위와 비외교적 행위를 구분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굳이 개념화한다면 ‘선군외교’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군과 군사력을 외교적 도구로 삼아 강대국 중심체제 속에서 대외적인 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군외교는 총을 든 외교로, 김정일은 총을 든 외교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동북아 지역에서 북한이 처해 있는 특수한 지정학적 상황, 둘째, 주변 강대국들의 군사적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핵이라는 보복수단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약소국가가 군사력을 외교적 자원으로 삼아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김정일은 이미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한·중 수교라는 위기상황을 맞아 “현 정세가 우리에게 불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잘 이용하면 오히려 화를 복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정학적 선군외교다.

일반적으로 약소국가들은 지리적으로 초강국들과 멀리 있거나 다른 국가들을 사이에 두고서 조금 떨어져 있어야 자주성을 지키는 데 유리하다. 역사상 가장 종속적이었던 나라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강대국들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다. 만약 그레나다(Grenada)나 파나마도 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미국의 압력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구 소련과의 관계에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일찌감치 독자노선을 걸을 수 있었던 것도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사이에 루마니아·헝가리·불가리아가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초정밀, 초고속, 초고성능을 자랑하는 과학적 무기체계가 발달된 오늘날 강대국들과 단지 지리적으로 멀다는 점만으로는 약소국가들의 체제안정 보장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지정학적으로만 보자면,이라크는 미국과 충분한 지리적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후세인은 미국의 군사적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후세인이 김정일처럼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세인도 북한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알고 북한의 선군외교 노선을 따르려고는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지정학의 선군외교에 바탕한 김정일의 외교술은 이중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북한은 자신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국·러시아 같은 북방 강대국가와 미국·일본 같은 남방 강대국가 간 경쟁의 첨예한 요충지라는 점을 유인 요소로 삼아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체제 유지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이끌어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 무기를 개발, 자국 주권에 대한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 요인을 사전에 제거해버리기도 한다.

'우리식대로'의 주체외교

김정일의 선군외교에는 두 유형이 있다. 첫째, 김정일 본인이 직접 나서서 담판을 짓는 정상회담이다. 둘째, 김정일을 제외한 북한 외무성의 외교실무진이나 군·당 소속 관료들이 펼치는 실무급 외교이다. 전자는 정상외교이자 평시외교이고, 후자는 전시외교이자 실무외교라 할 수 있다.

김정일은 2000년 5월과 2001년 1월 중국을 방문, 양국 최고 지도자 간 협의채널을 복원했다. 2000년 6월엔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남북경협을 활성화시켜 놓았다.이외에 2004년 5월 2차 조·일 정상회담과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으로 열린 김정일-올브라이트 회담,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10.4 선언 등은 탈냉전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된 북한에 새로운 대외적 활로를 열어준 정상외교의 성과였다.

주목해야 할 것은 김정일의 이런 정상회담 외교는 반드시 일정한 외교적 성과가 기대될 때에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엄밀히 말해 김정일이 나서는 정상회담은 북측에 유리한 외교적 결과를 거둬들이는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되거나, 아니면 외교적 결과가 확정되었을 때 이루어졌다.

이같은 정상외교의 회담 분위기는 그 어떤 형태의 외교회담보다도 화기애애하며, 외교 의전도 일상적이며 평시와 다름없는 형태로 진행된다. 소위 ‘우리식대로의 외교’ 의전으로, 딱딱한 외교적 격식보다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회담을 진행하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김정일이 상대국가에도 매우 엄격하게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부분이 있다. 자신의 방문 스케줄에 대한 철저한 보안이다.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하거나 러시아를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했을 때도 이들 나라에서 그에 관한 동정은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다만 양국 정상 간에 어떤 합의가 있었고 어떤 문제를 논의해서 외교적 우의를 다졌다는 정도의 보도만 나간다. 특별히 김정일과 상대국가의 최고지도자 간에 공동 기자회견을 갖는다든지 외신들 앞에서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리고 정상회담을 마친 후 김정일이 그 나라를 여행한다 하더라도 그의 여행 스케줄은 철저히 비밀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외신들은 김정일이 정상회담을 마친 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잘 모른다. 그의 스케줄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그에게는 가장 큰 외교적 결례인 것이다. 그에게 이것은 그의 생명을 노리는 세력에게 자신을 추적하라고 알려준 행위나 다름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김정일은 외교 스케줄을 짤 때도 완벽하게 자기 위주로 만든다. 스케줄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는 일에서부터 스케줄 구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신변보호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상대방 국가 에도 철저히 요구한다.

이와 관련, 2000년 남북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생긴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남측 실무책임자들이 북측의 동의 없이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동선과 스케줄 등 세부 계획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김정일과 동행하기로 한 스케줄까지 공개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김정일은 정상회담 전 세부사항 협의차 방북한 남측 실무책임자에게 자신의 불만을 이렇게 표출했다.

“김 대통령의 안전 문제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보안을 철저히 하여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외부 방해세력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언제 내부 불순세력이 침투할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그래서 도착 일정을 갑자기 하루 앞당기거나 하루 늦춰서 혹시 있을지 모를 방해세력들에게 혼돈을 주는 방안도 강구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실제로 정상회담을 이틀 앞둔 시점에서 북측이 일정의 전면 변경을 요구해 와서, 하루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한에서는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열리지 않고 연기된 배경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혹시 회담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냐 하는 우려도 매우 높았다. 결국 정상회담이 열리긴 했지만, 북측은 연기 배경에 대해 ‘기술적 준비관계’로 불가피하게 하루 연기할 수밖에 없다고 했고 남측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은 이때부터 분단 이후 최초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에서 정상외교의 주도권을 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상 북한이 정상회담의 일정을 재조정하자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신변 안전과 경호 문제를 그 이유로 들었지만, 최우선 과제는 김정일 자신의 신변 안전이었다. 그동안 북한 내부에서조차 김정일 관련 일정을 끝까지 극비보안 상태로 유지하는 건 상례였고, 그런 맥락에서 북측의 갑작스런 정상회담 일정 변경의 요구는 별로 이례적이거나 기상천외한 사건이 아니었던 셈이다.

김정일이 자신의 외교 스케줄을 생명줄이나 다름없을 만큼 중요하게 여겼던 일화는 또 있다. 김정일은 2001년 늦봄이나 초여름 경에 러시아를 국빈 자격으로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러시아 쪽에서 모든 준비를 거의 완료했을 때 갑자기 모든 계획이 중단되어버렸다. 그의 방러 스케줄 일부가 러시아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게 발단이었다.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은 결국 성사되긴 했지만 2001년 8월에야 이뤄질 수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무척 당혹스러워했지만 김정일에게는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으며, 의전상 기밀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 그리고 김정일은 자신의 러시아 방문에 관한 논평이나 언론 공개는 정상들이 만나서 결의를 채택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얻은 뒤에나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생각을 러시아 정부는 알지 못했다. 또한 그가 회담 관련 사항들이 마치 합의된 것인 양 서둘러 언론에 공개되는 데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김정일이 러시아를 방문할 당시 그의 방러 스케줄을 사전에 알고 있던 러시아측 인사들은 러시아 대통령 비서실과 외무성, 철도부의 일부 간부들로 국한되어 있었다.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 일자는 7월 말에서 8월 말까지 매우 유동적이었고, 그를 맞이하는 방안도 매우 다양하게 검토되었다.

김정일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신변을 최우선적으로 보호, 방어하는 것을 정상외교의 첫 단추로 생각한다. 그래서 정상외교의 시작과 더불어 상대국을 긴장, 당황케 만들어 조바심이 나도록 분위기를 이끌고 간다.김정일은 외교를 할 때 상대국을 자신이 설정해 놓은 프레임에 가둬 놓고 시작하지, 상대방이 쳐 놓은 프레임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1993년 3월, 북한은 핵확산 금지조약(NPT)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의 세계적인 북한 전문가는 이를 두고 ‘절묘한 행동(brilliant act)’이라고 표현했는데, 당시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특별사찰 수용 압력을 받고 있었다.IAEA 특별사찰을 수용할 경우에는 아무런 이득도 챙기지 못하고 손해만 볼 것이요, 수용하지 않는 경우는 국제사회의 압력이 한층 더 거세지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김정일이 선택한 카드는 NPT 탈퇴였다. 그 결과 미국과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특별사찰 대신 어떻게 하면 북한을 NPT 체제에 묶어두느냐 하는 문제가 최대의 외교적 과제가 됐다. 북한으로서는 ‘절묘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만일 NPT 체제로부터 탈퇴하지 않았더라면 북한은 꼼짝없이 핵사찰을 수용하거나 국제사회로부터의 엄청난 제재와 압력을 받아 체제유지에 심각한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자국에 불리한 국제사회의 프레임워크를 깨고 거꾸로 스스로 설정한 프레임워크에 국제사회를 끌어들이는 외교술을 구사했다. 북한을 제대로 요리하겠노라고 벼르고 있던 국제사회는 하루 아침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 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외교적 행보는 엄격히 말해 좋은 외교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무작정 나쁜 외교라고 하기도 어렵다. 이런 점에서 김정일 외교의 특징이 무엇인가 짚어보는 건 자못 흥미로운 일이다.

(필자 장성민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에서 북한정치를 연구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세인트존스대학 국제문제연구소에서 '현대 영국과 국제문제'과정을 이수했다. 이후 미국 듀크대 국제문제연구소에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연구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 초대 국정상황실장과 16대 민주당 의원을 지냈다. 의원시절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로 활약중이다. 저서와 역서로 '전쟁과 평화: 김정일 이후, 북한 어디로 가는가' '전환기 한반도의 딜레마와 선택"9·11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등이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