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속으로]'우리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최완수 外著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진경 (眞景) 시대를 아는지. 귀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겸재 (謙齋) 정선 (鄭敾) 의 진경산수화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한국 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대화가의 한사람으로 칭송받는 겸재 말이다.

중국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그려내는 조선 특유의 화법을 창안했다.

진경시대는 이처럼 조선왕조가 한껏 자신의 개성을 뽐내며 난만한 발전을 이룩했던 조선 후기를 문화사적으로 일컫는 명칭. 숙종 (1675~1720) 대부터 정조 (1777~1800) 대까지 1백25년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진경시대를 주목하는 이유는? 우리 문화재 수집가로 널리 알려진 고 (故) 전형필 (全鎣弼) 씨의 유지 (遺志) 로 설립된 간송미술관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실장의 대답. "진경시대는 조선문화의 절정기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엄연한 역사의 참된 면모를 바로 보지 못한다.

조선왕조는 일제에 의해 진취적 기상이 전혀 없고 문화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됐다.

이제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는 이런 반성에서 지난 수십년 동안 조선의 참모습을 밝히고 민족문화 수호와 계승을 위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사상.정치.문학.미술 등의 전공자들과 함께 진경시대를 속속들이 들여다본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를 냈다 (전2권.돌베개刊) . 동참한 학자는 정옥자 (서울대).유봉학 (한신대).지두환 (국민대).정병삼 (숙명여대).강관식 (한성대).이세영 (한신대) 교수와 오주석 (한신대).방병선 (동국대) 강사, 그리고 김기홍 간송미술관 연구위원 등 9명. 대부분 그와 비슷한 생각을 나누어 왔다.

논문모음집의 딱딱함을 걷어내고 2백17컷의 도판도 싣는 등 교양서로 손색이 없도록 꾸몄다.

게다가 IMF사태를 단순 경제난국이 아닌 우리의 정체성이 걸린 문화위기로 규정할 때 향후 우리의 진로를 고민하는 데도 적잖은 충고를 던진다.

항상 외래 문물을 적극 소화하며 노쇠한 전통문화를 활기있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지혜를 보여주는 까닭이다.

저자들은 이처럼 진경시대를 문화 활력.생기의 모범시대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 시작을 중국과 변별되는 조선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의 개화에서 찾고 있다.

중국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퇴계 (退溪) 이황 (李滉) 과, 이를 발전적으로 심화시킨 율곡 (栗谷) 이이 (李珥)에 이어 조선 전기의 부패상과 보수세력의 무능함에 반발하며 이상사회 건설을 갈망했던 사대부들의 꿈으로부터 진경문화의 싹이 텄다는 시각. 거기에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의 청나라 대신 조선이 중국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겠다는 문화적 자존심, 이른바 조선중화주의가 크게 작용했다.

진경시대의 '진가' 는 여러 분야에서 표출됐다.

저자들은 이러한 시대의 역동성을 총체적으로 살펴본다.

우선 문학에서 송강 (松江) 정철 (鄭澈) 이 한글 가사문학으로 국문학 발전의 서막을 장식했고, 서포 (西浦) 김만중 (金萬重) 은 '구운몽' 등 한글소설을 써내기 시작했다.

석봉 (石峯) 한호 (韓濩) 는 조선 고유의 서체인 석봉체를 이룩했고, 지극한 국토애에 기초한 진경산수화는 모두 (冒頭) 의 겸재 정선에 의해 완성됐다.

그리고 그의 화풍은 후대의 김홍도 (金弘道).신윤복 (申潤福) 등의 풍속화에서 대미를 맺게 된다. 조선 특유의 순백색을 자랑하는 백자 문화도 한껏 고양됐으며 숭유억불책 (崇儒抑佛策) 으로 위축됐던 불교계도 일상 생활을 재현한 듯한 불화와, 단정하고 야무진 목조조각 등 문화유산을 만들어 냈다.

또한 이런 시대 분위기를 타고 영조.정조 같은 '문화군주' 도 탄생하게 됐다.

반면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순조 이후 청나라를 통한 근대 문물의 유입에 따른 북학의 융성, 그리고 외척 등 세도정국이 빚은 사림정치의 붕괴로 진경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문화의 생성과 절정, 그리고 외래.전통문화의 창조적 변용이란 잣대로 볼 때 진경시대는 두고두고 반추할 시기임이 분명하다.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