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주룽지(朱鏞基)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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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40년대말 중국의 3대 명문대학을 꼽으라면 베이징 (北京) 대.칭화 (淸華) 대.런민 (人民) 대다.

중국 장쩌민 (江澤民) 총서기의 오른팔이자 개혁경제의 총수로 부상한 주룽지 (朱鎔基) 총리는 칭화대 전기공정과를 졸업했다.

49년 칭화대 학생회장으로 선출되면서 공산당에 입당한다.

당시 베이징대에는 후치리 (胡啓立.현 전자공업부장) 와 천시퉁 (陳希同.전 베이징시당서기) 이 있었고 칭화대엔 주룽지.리시밍 (李錫明.전 베이징시장) 이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상하이에선 차오스 (喬石).장쩌민.첸치천 (錢其琛) 이 활약하고 있었다.

주룽지의 총리 임명 이후 서방 언론은 '급부상' 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의 성장은 결코 순탄하지도, 평지돌출도 아니다.

대학 졸업후 그는 잘 나갔다.

동북인민정부 공업부 발령을 받고 1년만에 부주임으로 승진한다.

동북인민정부 주석이었던 가오강 (高岡) 이 그의 뛰어난 실력을 인정해 국가계획위 판공실 부처장으로 끌어 올린다.

28세때였다.

그러나 후견인이었던 가오강이 소련 스파이로 몰려 자살하자 그에게도 고난의 역정이 시작됐다.

57년 반우파투쟁때 5년, 70년 문혁숙청으로 5년 도합 10여년 세월을 노동종사와 노동개조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75년부터 그의 고달픈 운명에도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경제학자 마훙 (馬洪).국가경제위주임 캉스언 (康世恩) 의 추천으로 그의 친정이라 할 국가경제계획위로 복귀한다.

이 무렵 주룽지는 국가경제계획 목표치들이 너무 높게 책정됐다며 공직자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엄격한 제도와 처벌을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 중이던 덩샤오핑 (鄧小平) 의 눈에 띄어 화려한 출세가도가 열린다.

상하이시장으로 부임한 주룽지는 취임 직후 '상하이 웅풍 (上海雄風)' 재건이라는 구호 아래 간부 청렴수칙을 내걸고 '간부청렴가' 를 만들어 출퇴근 때마다 상하이TV를 통해 방영했다.

92년 덩샤오핑이 남순강화 (南巡講話)에서 촉구한 개혁.개방 가속화에 대해 인위적 성장촉진보다는 안정속의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는 직언을 그는 서슴지 않았다.

93년 부총리 겸 인민은행장을 맡았을 때 중국 신화통신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과단성 있고 공평무사하며 마무리가 번갯불처럼 빠르다' (鐵面無私 雷려風行) . 우리나라에서도 요구되는 IMF체제하의 경제개혁을 주도할 모범적 관료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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