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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4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강성민이 다시 주문진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다.

승희로부터 선착장 노점거리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다는 귀띔을 받고 선걸음으로 달려갔다.

어판장 주변 도로에는 삼사층으로 지어 올린 번듯한 전문횟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 때문인지 여행자들이 북적거리는 곳은 선착장 부근의 노점들이었다.

그 속에서도 유별나게 보이는 좌판은 멀리서도 대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좌판으로 다가갔다.

유별나게 보였던 것은, 좌판 뒤에 걸려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는 현수막 때문이었다.

'정직한 한철규의 시가 있는 토종세일' .흰색 바탕의 천에 붉은 색의 과장된 큰 글씨로 박아 쓴 문구가 그랬다.

더욱 더 신기했던 것은, 현수막 한 켠에 역시 큰 글씨로 쓰여진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 이란 시구였다.

나는 나룻배/당신은 행인/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엷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 않고 가십니다그려/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나는 나룻배/당신은 행인. 그런 착안은 노점 앞을 오가는 사람들 거개가 도시에서 온 가족여행자들이란 것과, 현수막의 시구에 눈길을 멈추다보면, 어차피 좌판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된다는 유치하고 단순한 논리가 깔려 있었다.

묻지 않아도 그것이 한철규의 생각이었다는 것에 실소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행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구를 읽는 시늉만 하다가 자리를 뜰 뿐 좌판에 쌓아둔 건어물들을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명태에다 크레용칠이라도 해드릴까요?” 난로에 손을 쬐고 있는 한철규에게 다가가며 강성민은 엉뚱한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의 출현에 화들짝 놀란 한철규도 악수를 나누려다 말고 강성민의 어깨를 치면서 맞장구부터 쳤다.

“그래, 옛날에 우리 그런 일을 벌였었지. 그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대학 재학시절, 여름방학 때의 일이었다.

방학 마감이 열흘 정도로 다가왔을 무렵, 여름내내 서울에서만 갇혀 있었던 네 사람의 고등학교 선후배들은 영등포역에서 남행열차를 타기로 했다.

철규와 성민, 그리고 조한석과 민창제 같은 또래들이었다.

그러나 일행 중에 시골에 친인척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겨냥한 목적지도 없었다.

다만 그 당시로선 '그리움과 회한의 기억들이 수평선 너머에서 빗살무늬로 되살아나는' 것으로 곧잘 회자되었던 남해안 바다를 경험하고 돌아오자는 가벼운 논의만 있었던 여행이었다.

광주를 지나고 목포까지 갔으나, 며칠 동안 정류장 벤치의 노숙으로 입성들이 꾀죄죄해진 것밖에는 기억에 남을만한 사건들은 없었다.

때문에 남해안 끝까지 가보자던 처음의 계획도 시들해져버렸다.

그 일이 있었던 것은 서울로 돌아가는 길목이었던 담양에 도착하고부터였다.

새벽녘에 기차를 내린 그날은 공교롭게도 담양 장날이었다.

죽물시장 구경을 해보자는 성민의 제의에 따라 찾아간 곳이 그 지방에서는 삿갓전머리로 일컬어지는 죽물시장이었다. 천변에 있는 해장국집에서 허기를 모면한 그들이 시장순례를 나선 것은 아침7시경이었다.

비만 내리면, 범람하는 수해 방지를 위해 옛날에 심었다는 관방천 (官防川) 의 풍치림 아래 고수부지에 있는 죽물시장은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장꾼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키바구니, 소쿠리, 대나무로 엮은 상자, 채반 같은 수제품들이었다.

그러나 장꾼들로 북적거리기는 하는데, 거래는 활발하지 않았다.

물건을 사갈 중간상인들이 일찌감치 나타나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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