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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스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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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박재삼 시인의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막벌이 노동을 했고, 어머니는 어물장수를 해서 근근이 살았다. 기부금 3000원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못 하고 신설 여자 중학교였던 삼천포중학교에서 한때 사환으로 일했다. 초등학교 동창 여학생들이 공부하는 여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맞춰 종을 치고 교무실 잔심부름을 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살면서도 박재삼 시인이 시를 쓰겠다는 꿈을 키우게 된 데에는 몇 분 스승과의 아름다운 인연이 있었다.

우선 삼천포중학교 국어 선생님이었던 김상옥 시인이 있었다. 박재삼 시인은 김상옥 시인이 펴낸 시조집 『초적(草笛)』을 사볼 형편이 아니어서 그 시조집을 빌려다가 공책에 쓰고 애송했다. 박재삼 시인은 스승 김상옥 시인 덕택에 중학 시절부터 부지런히 시를 쓰고 고치는 습작을 했다. 또 한 분의 스승은 이병기 시인이었다. 1952년 이병기 시인은 전북대 교단에 서고 계셨고, 고등학생이었던 박재삼 시인은 삼천포에 살았다. 박재삼 시인은 이병기 시인에게 자신의 습작을 봐달라는 편지를 냈다. 이병기 시인으로부터 네 차례쯤 답장을 받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일면식도 없는 고등학생에게 답신을 보낸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병기 시인은 그 일을 했다. 박재삼 시인은 후일 한 산문에서 이 일을 회고하면서 붓으로 쓴 이병기 시인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강한 서권기(書券氣)가 풍겼다고 썼다. 1954년 초봄, 보슬비가 내리는 밤에 박재삼 시인을 찾아온 한 시인이 있었다. 유치환 시인이었다. 갓 출간된 이영도 시조집을 전해주러 빗속을 뚫고 박재삼 시인을 찾아온 것이었다. 유치환 시인은 박재삼 시인보다 스물다섯 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체면 같은 것을 중시하지 않았다. 유치환 시인은 다정다감한 스승이었다.

박재삼 시인의 스승 얘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 나도 나의 스승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나는 경북 김천시 봉산면 태화초등학교를 다녔다. 한 학년당 학생이 마흔 명 남짓 되는 작은 시골 학교였다. 초등학교 5학년 점심시간이 떠오른다. 담임선생님은 제자들과 함께 교실에서 점심 식사를 하셨다. 시골 학생들의 도시락 반찬은 늘 먹는 반찬으로 뻔했고, 더러 점심을 챙겨오지 못한 학생도 있었다. 선생님의 도시락은 유난히 컸고, 그것을 학생들과 나눠 드셨다. 학생들의 가정 형편을 속속들이 알고 계셨고, 결석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 학생의 집을 찾아가 보셨다.

언젠가 나의 집에도 찾아오셨는데 내가 염소를 몰고 들로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내 곁에 선, 뿔이 막 솟는 어린 염소를 쓰다듬어 주셨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당신의 자제가 사용하던 참고서와 책을 나에게 물려주셨다. 학생들에게 늘 경어를 사용하셨고 무척 겸손하셨다. 선생님은 내게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스승은 나의 낙담과 관심과 꿈을 ‘있는 그대로’ 보셨다. 경청하셨다. 스승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경청의 은혜,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너무 큰 빚을 얻었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