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훈 허리디스크 극복 쇼트트랙 은메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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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금메달보다 더 값진 은메달' .

23일 나가노겨울올림픽을 마치고 귀국비행기에 오른 한국 쇼트트랙의 채지훈 (24.삼성화재) 은 이번대회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남자5천m 계주에서 딴 은메달을 소중히 어루만져보며 깊은 감회속에 빠져들었다.

지난 21일 나가노 화이트링. 앞서 가던 중국선수가 넘어지면서 이호응이 함께 넘어졌다.

순간 그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아픈 허리를 감싸안으며 지옥훈련을 이겨낸 그에게 가장 확실하다고 자신했던 금메달이 바로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허탈한 마음도 잠시. 1년여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병마를 이기고 따낸 은메달이었기에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끊어질듯 아픈 허리, 찌릿찌릿 저려오며 마비증세를 일으키는 왼쪽다리. 96년말 갑자기 찾아온 허리부상에 채지훈은 몹시 당황했다.

허리를 한껏 구부리고 스케이트를 타야 하는 쇼트트랙 선수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디스크.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했으나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지난해 2월 태릉선수촌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학 1년때인 94년 릴레함메르겨울올림픽에서 5백m 금메달, 1천m 은메달을 따내며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했던 기억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95년 스페인 하카 겨울유니버시아드대회 4관왕, 95년 세계선수권 3관왕, 96년 아시안게임 3관왕 등 화려했던 나날도 이젠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듯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채지훈은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원을 오가며 물리치료와 한방치료를 병행하기 3개월. 그러는 사이에 무주.전주유니버시아드 (2월).97세계선수권 (3월) 등 굵직한 대회가 모두 지나갔다.

자연 "채지훈의 선수생명은 끝났다" 는 말들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채지훈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허리통증이 어느 정도 가신 지난해 5월 채지훈은 다시 태릉선수촌을 찾았다.

여자선수보다 약해진 체력이었지만 오기로 다져진 채에게는 결코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가슴이 터질 듯 가쁜 숨을 토해내며 하루 4시간의 스케이팅과 웨이트트레이닝을 거듭했다.

지난해 9월 대표선발전에서 이준환에 이어 당당히 2위를 차지, 대표팀 맏형으로 이번 대회에 출전했던 채지훈. 이제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을 목에 걸고 당당히 개선한 그는 좌절과 아픔의 시대에 진정한 승리자였다.

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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