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리는 YS정부…김영삼 대통령의 5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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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김영삼대통령의 얼마 남지않은 권력 하산길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환호와 갈채 속에 내건 '신한국 창조' 의 간판은 완전히 퇴색했다.

비아냥과 조롱의 소리도 높다.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체력은 빌릴 수 없다" 는 그의 건강학은 나라를 거덜낸 상징이 돼 코미디 소재로 등장한다.

5년전만 해도 그가 '실패한 대통령' 이 될 것으로 상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만큼 좋은 조건에서 출발한 대통령이 없기 때문이다.

전임자들이 일궈낸 경제기반에다 민주적 정통성을 갖췄다.

경제발전.민주화까지 완성하는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金대통령이 좌절한 이유는 무엇인가.

전.현직 참모 대부분은 국가운영의 체계적인 프로그램 빈곤과 국가 경영자로서의 안목.인식 부족을 꼽고 있다.

그의 취임 때 국정지표는 변화와 개혁이었다.

초기에 질풍노도 (疾風怒濤) 처럼 전개된 부패척결 작업과 군 (軍) 개혁으로 90%의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전략.목표는 불투명했다.

이를 추진하는 시스템이 짜여있지 않았다.

주도세력은 있는 듯 했지만 나중에 확인됐듯 오히려 일을 저지르는 존재였다.

金대통령은 '깜짝 쇼' 와 독선으로 변질되기 쉬운 '고독한 결단' 을 즐겼다.

그러다보니 개혁이 국가운영의 효율성.경쟁력 향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개혁은 과거를 캐는 검찰의 공권력 행사로 좁아졌다.

그것도 자기한테 대들거나 비판적인 세력을 손보는 '표적사정' 시비에 시달렸다.

그나마 95년부터는 정권 재창출의 의욕 탓에 국정의 정치우선 현상이 두드러졌다.

자연히 개혁은 표류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가입이나 국제통화기금 (IMF) 위기 원인의 하나인 무모한 환율방어에도 정치논리가 개입돼 있다는 평가다.

여기에는 金대통령의 국가통치에 대한 접근자세, 행태.능력의 문제점이 깔려있다고 다수의 전직 각료들은 기억한다.

金대통령은 국가관리를 경영적 측면보다 선과 악으로 양분하는 종교적 자세로 상당부분 접근했다.

칼국수를 먹고 "돈 한푼 안받겠다" 는 선언으로 국가를 충분히 끌고 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도덕주의는 과거 정권과의 차별화를 강화하게 마련이다.

그는 이승만 (李承晩) 정권부터 6공까지를 비정상과 부도덕쪽에서 주로 관찰했다.

심지어 문민정부를 상해임시정부로 연결하려는 역사전개의 무모함마저 보였다.

그는 전임자들의 대북정책과 다양한 경험들을 평가절하했다.

이를 대북정책의 혼선 요인의 하나로 통일문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민주화 경력에 대한 과잉 자부심은 외교의 실리측면을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

93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의 한국방문은 고속철 TGV의 판매가 목표였다.

반면 金대통령은 자신의 민주화경력 덕분에 미테랑이 왔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믿었는지도 모른다.

허세와 명분의 외교가 대미.대일관계의 악화로 이어졌다.

내각과 청와대비서실.안기부에 대한 金대통령의 의존도는 과거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 공백은 차남 현철 (賢哲) 씨의 사조직과 집권 민주계가 차지했다.

지난해 현철씨의 구속으로 국정마비 현상이 온 것은 공조직의 역할 공간이 형편없음을 실감케하는 대목이다.

여기에다 잦은 장관교체는 행정난맥에다 권력의 안정성을 허무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金대통령을 압박했다.

金대통령은 인기를 중시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비판을 쉽게 수용하지 않았다.

개혁이 인치 (人治) 로 이뤄진다는 반응을 '기득권 세력의 저항' 이라며 외면했다.

지금 金대통령은 "역사가 문민정권을 재평가할 것" 으로 자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반면교사 (反面敎師) 의 참담한 역할에서 상당기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일반적 전망이다.

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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