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금융을 정보산업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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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이나 영국같이 공개된 사회에서는 정부와 기업에 관한 정보가 풍부하고 정확하며 정보수집 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이와 같이 진보된 정보사회의 환경을 배경으로 기업은 주식이나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기에 편리하며, 일반가계는 이런 증권에 큰 위험부담 없이 투자할 수 있어 증권산업이 발달하게 됐다.

1980년대부터 서구에서는 정보기술혁명의 가속화로 증권거래의 비중이 증가하고 세계 금융시장이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면서 정보화에 앞선 금융기관들이 경쟁력을 구비하게 됐다.

아울러 금융산업은 전통적인 예금.대출업무를 넘어 기업이나 가계의 자금거래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처리.공급하는 정보산업으로 그 성격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문화적.역사적인 배경이 다른 동아시아에서는 기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정확지 못한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정보화에서 크게 뒤떨어져 있다.

때문에 주식.채권의 장래 수익성이나 위험성을 판단하기 어려워 일반저축자들은 예금형태의 자산을 선호하고 결국 기업도 은행대출에 의존하게 된다.

은행 또한 대출고객과 장기 고객관계를 형성해 한정된 경로를 통해서만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폐쇄적인 경영으로 정보화에 둔감해지게 됐다.

그러다가 1990년대초부터 동아시아경제는 별다른 준비 없이 금융시장을 개방하면서 영.미가 지배하는 증권 중심의 국제금융시장에 뛰어들었으나 최신정보기술과 금융기법으로 무장된 서구 금융기관과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들과의 경쟁에서 낙후되고 마찰이 심화되면서 동아시아 경제는 금융위기를 방어할 힘을 잃게 된 것이다.

한국이나 동남아에서는 기업.금융기관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어렵고, 특히 이들의 경영이 불투명해 서구 금융기관들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대출이나 투자를 하는 경우 단기로 자금을 운용함으로써 투자에 따른 위험을 최소화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반면 동아시아 금융기관들은 영.미 등 외국 금융기관의 영업형태나 전략을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영.미의 주요 금융기관들이 동아시아의 국제 금융거래를 주도하게 됐다.

더 한심한 일은 동아시아 금융기관들은 외국금융기관들도 전통적인 장기고객관계를 중시하는 것으로 믿고 아무리 금융여건이 악화되더라도 이들이 하루아침에 자금공급을 중단하리라고는 예상치도 못하고 있었다.

일단 우리도 금융시장을 개방함에 따라 영.미가 주도하는 국제금융시장에서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융산업을 새로운 정보산업으로 발전시켜야 하며, 이러한 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금융거래와 관련된 절차와 회계관행, 자금거래 및 결제제도, 그리고 금융감독 등 금융의 하부구조를 서구의 제도와 합치하도록 전부 고쳐야 한다.

금융기관들도 금융의 정보화가 새로운 컴퓨터시설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외 금융시장.기업.산업.정부정책 등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해 분석.처리하고 이를 이용하는 경영형태와 체제를 정착시키는데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금융산업이 정보산업으로 발전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경제주체들이 정보를 서로 쉽게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풍토와 체제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정부기관이건, 기업이건 어디를 가도 대부분의 정보는 기밀사항으로 돼 있어 공표를 꺼린다.

심지어 같은 조직 내에서도 정보의 교환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물론 모든 정보를 공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밀에 속하지 않는 정보는 최대한 공개해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정부부터 정보공개 의무화의 범위를 넓혀 가는 것이 금융산업은 물론 사회 전반의 정보화를 촉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 경제는 금융시장 개방으로 주기적인 금융위기에 노출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러한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금융의 정보화를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추진해 금융기관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아무리 금융산업이 취약하더라도 다시 금융시장의 문을 닫기 어려운 이상 결국 금융의 정보화로 우리 시장을 방어할 수밖에 없으며, 이런 관점에서 정보화는 더 한층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게 된다.

박영철<고려대 경제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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